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

 1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1
 2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2
 3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3
 4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4
 5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5
 6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6
 7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 근대문학의 성립 개화 계몽시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의 근대문학은 개화계몽 시대에 성립되어 그 사회 문화적 기반이 확대되었고 일본 식민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문학 양식의 분화와 함께 각 양식의 특성에 따라 문학의 정신과 기법이 다채로워진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개화계몽 시대 문학의 특성들을 근대문학 성립의 배경과 서사 문학과 시가 문학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국어 국문운동과 근대문학의 성립
(1) 한국 사회의 근대적 변혁
문호 개방(1876)이후 한국인들은 서양의 존재를 통해 ‘조선’과 ‘조선민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였고 그 결과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해체하고 민족의 자주와 국가의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민족의 주체적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과정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구성하는 고유 언어와 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면서 국어국문운동이 촉발되었다. 국어국문운동은 개화계몽운동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봉건적인 조선 사회의 낡은 제도와 관습과 가치의 붕괴를 촉진시키고 국문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모든 가치 개념을 대중적으로 구현하게 하였다.
국어국문운동과 관련하여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정치개혁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운동은 농민 계급이 동학의 조직을 통해 봉건적인 사회 체제와 지배층의 횡포에 저항하면서 조선사회를 주체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한 운동으로 이념을 국문으로 이루어진 가사를 통해 민중에게 유포하였다. 동학운동을 통해 농민 계층은 정치 사회 문화의 담론적 공간에 주체로 등장하였고 이들이 조선 왕조의 정치체제를 바꾸지는 못하였지만 변혁의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특히 정부의 법률 칙령을 국문으로 발표하고 국한문을 혼용하여 쓰도록 하게 함으로써 문자 생활과 문학 활동의 변화를 이끌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에 결성되어 1898년에 해체되기까지 한국의 정치제도와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을 위해서 대중적인 정치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독립신문》을 국문으로 발간하여 대중적인 매체로서 정치적 담론을 국문을 통해 구성하였다. 동학운동과 독립협회운동의 계몽 의식을 담론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국문은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제도의 확립과 실천을 의미한다.
(2)국어국문운동과 국문체
고종이 홍범(洪範) 14조에서 근대 교육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육을 전담하는 학부아문(學府衙門)이 설치되고,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의 발표, 한성사범학교 개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대중교육 등의 새로운 교육제도가 정비되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국문 또는 국한문 혼용을 활용하여 교과용 도서를 발간하였고 시험에도 국문이 정식 과목에 포함되었다. 이런 새로운 교육제도의 확립과 과거제의 폐지 등을 통해 국문 사용이 정착되면서 대중적인 독자를 상대로 국문신문과 잡지의 간행이 이루어졌다. 특히 《독립신문》이 순국문으로 간행된 뒤에 《대한황성신문》,《제국신문》등이 국문으로 발간되어 국어국문운동이 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 《독립신문》에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국문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점과 조선의 글로서의 국문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강조하여 국문 사용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시대의 국어국문운동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유길준의 『대한문전(大韓文典)』, 주시경의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과 같은 저술이 나오고 1907년 국문연구소를 개설하여 국가적으로 국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국어국문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주시경은 국문의 전용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국문의 독자성, 대중성과 실용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노력이 국문의 학문적 연구로 심화되고 한편으로는 사회계몽운동으로 확산되어 많은 개화계몽운동가들도 국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박은식의 『홍학설』, 『학규신론』, 장지연의 『국문관계론』, 신채호의 『국한문의 경중』에서도 국문 전용 사용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다. 이런 국어 국문론은 교육과 신지식의 보급이라는 요구뿐만 아니라 국가의 독립을 완전히 할 수 있다는 언어 민족주의의 관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한문을 중심으로 했던 문자 생활이 국문 중심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국문에 한자를 혼용하는 국한문이 등장하였다. 한문체는 중국어의 구조에 의거하여 한문으로 표기되기 때문에 일종의 번역과정을 거쳐야 한다. 초기에는 한문구에 국문으로 토를 달아놓은 정도였으나 국어의 통사구조를 바탕으로 국문과 한자를 혼용하는 방식으로 구조가 바뀌었고 국문 문장의 일부 단어가 한자로 표기되는 방식으로 고정되면서 국한문체가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문의 쇠퇴와 국문의 확대는 한문을 기반으로 하는 지배층의 몰락과 조선시대 언문체의 기반이 되었던 여성과 평민층의 성장을 의미하며 새롭게 등장한 국한문 혼용 방식은 개화계몽운동을 주도했던 지식층의 사상적 절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한문 혼용이 일반화되면서 한문투의 문장 구조를 벗어나게 되었고 한국인들은 국문 전용을 추구함으로써 국문체의 사회 문화적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국어국문운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확대된 국문체는 일상적인 현실 언어에 근거한 표기 체계이고 지배층의 문화적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언어 문자 행위를 붕괴시키면서 동시에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전근대적인 설화적 공간을 무너뜨렸다. 예를 들어 창으로 불렸던 시조와 가사가 새로운 읽는 시의 형태가 되고 고전소설의 운문적인 특성을 신소설에서는 산문 문체로 실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다양하게 분화된 서사 양식을 통해 담론적 공간은 크게 확대되었고 신문 기사와 논설 기사도 서사적 성격이 강하였다.
(3)새로운 글쓰기로서의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