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형 김현승의 작품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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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다형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음력 2월 28일) 전라북도 출신 부친 김창국(金昶國)과 모친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출생지는 부친의 신학 유학지인 평양이다. 부친은 개신교 목사인데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모친도 황해도 은율사람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의 부친은 종교적으로 엄격하여 3남2녀의 자녀에게 신약성서에 기록된 대로 행하도록 가정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혈연적 전통은 김현승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부친의 교역 근거지인 전남 광주시로 이주하여 미션계 mission: 선교, 전도의 기독교적 성격.
의 숭일학교 초등과에 입학하였고 다음해인 1927년 4월에는 형이 유학하고 있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2년에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위장병의 악화로 1년을 쉬고 1934년 4월에 다시 복교하여 학업지연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중학 시절 이래의 숨은 포부였던 시작(詩作)에 열중하여 1934년 5월 교지에 투고한 2편의 장시가 당시 시인이며 문과 교수였던 양주동교수의 눈을 끌게 되어 교수의 소개로 《동아일보》문화란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1936년 지병인 위장병이 다시 악화되어 휴양을 목적으로 광주로 귀향하여 광주의 모교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8년 부친이 목사로 있던 양림교회의 장로인 장맹섭의 영애이자 수피아여고 기독교학교의 일종.
의 음악선생이었던 장은순과 결혼을 했다. 1년간의 휴양계획이 2년으로 연장되어 지체된 후 복교하기 위해 평양에 갔으나 신사참배문제로 교문이 닫히고 말아 평양에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8·15광복까지 울분의 나날을 보낸다.
학업은 중단되고 교사직은 해고되고 원하지도 않았던 회사생활을 하며 무력감에 시달렸다. 이 동안에 모친상을 당해 삶의 무상함을 느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붓을 꺾고 침묵을 지키다가 815광복 후 1949년부터 다시 작품을 발표, “내일”, “동면(冬眠)” 등 지적이고 건강한 시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51년부터 조선대학 문리대 교수로 있으며 박흡(朴洽) 장용건(張龍健) 등과 함께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1954년 전남 광주(光州)에서 창간된 문예 동인지. 서정주(徐廷柱)·김현승(金顯承)·이동주(李東柱)·신석정(辛夕汀)·이석봉(李石奉)·박흡(朴洽) 등이 동인이었다. 시 외에 소설·평론·수필도 실었다.
(계간)을 6집까지 발행하여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고 자칫 단절될 뻔했던 광주 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대 재직 시절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문병란, 이성부, 오규원, 문순태, 이근배, 김종해 등 40여 명을 에 추천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57년에 처녀시집 를 간행하고, 1960년부터 모교의 후신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1963년에 제2시집 , 1968년에 제3시집 , 1970년에 제4시집 을 간행하였다. 197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을 출간했다. 저서로 (1972), (1974) 등이 있다.
1975년 4월 11일 채플시간에 기도하다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져 타계하였다.
Ⅱ. 시기별 작품경향
김현승의 작품을 4기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제1기는 식민지라는 민족적 상황에 의해 시인의 자유로운 시정신이 억제되는 가운데 자연을 통하여 민족의 현실을 노래하는 방향성 탐색기이다. 제2기는 해방 이후로 종교적 절대자에 대한 변하지 않는 믿음을 바탕으로 시인의 의식공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과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즉, 시인의 의식이 종교적 범주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제3기는 김현승의 신앙적 갈등이 나타나는 시기로 신에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 인하여 신을 잃은 고독의 세계를 추구한다. 제4기는 1973년 이후로 고독의 끝에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됨으로써 이제까지 그가 부정해오던 신의 존재를 깨닫고 더욱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시기이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숭실어문학회, 다형 김현승 연구, 보고사, 1996.
조태일, 「김현승 시정신 연구」, 태학사, 1998.
조규화, ‘김현승 시 연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03.
박춘덕, ‘김현승 시 연구’, 고신대학교, 2003.
안세희, ‘김현승 시의 전개양상에 따른 상상력 연구’,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 2004.
임현순, ‘김현승 시에 나타난 고독의 역설성 연구’, 부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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