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비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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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비극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미학 오딧세이를 읽어 내려가며 사실 다소 난해한 탓에 어려움이 있었다. 평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인 탓이기도 했지만, 예술에 관해 그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즐거움 뿐으로 이해했던 부분들을 학술적으로 풀어놓으니 도무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이유에서 였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구체적 이해보다는 전체적 이해를 통해 흐름을 알 수 있었고, 미에 관한, 그리고 예술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책의 내용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관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고, 그를 레포트 주제에 올려 놓은 후에 여러 자료들을 뒤적거려 봤다. 학창시절에 한번 쯤은 보고 들어봤을 법한 아리스토텔레스. 그의 미학에 관한, 시학에 관한 얘기를 해보려 한다.
나) 본론
1.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 모방
아리스토텔레스는 B.C.384년에 마케도니아의 남쪽 칼키디키 반도에 있는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왕의 시인인 니코마쿠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에 아테네에 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의 입학한 후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년간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미학 오딧세이의 본문에서도 이 두 철학자의 대화를 통해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들이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사제간의 철학적 차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플라톤이 모방적 테크네, 회화와 조각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했는지에 대해 상기해보자.플라톤이 회화와 조각을 "환영(illusion)의 창조다, 기만적인 눈속임이다" 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적이며, 모방을 알아 보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개의 그림을 보고 그것이 개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이라는 것이다. 곧 모방은 일종의 학습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에 즐겁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서 이런 말을 한다.
"학습과 경탄은 즐거운 것이므로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 또한 즐거운 것임에 틀림없다. 예컨대 회화, 조각, 시와 같은 모방작품은, 그것의 모방 대상이 즐거운 것이 아닐지라도 즐거운 것이 된다. 왜냐하면 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모방 대상이 아니라 모방과 모방된 대상이 일치한다는 추론이기 때문이며, 그 결과 우리는 뭔가를 배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방이 즐거운 것은 그 대상이 아름답다거나 특별히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최상의 즐거움은 학습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학습에 관한 즐거움, 즉 모방에 관한 그의 시각은 시학에서 고스란히 보여진다.
2. 시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일종의 모방 imitation이라고 정의한다. 시인은 그 나름의 개성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인생을 재현해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통하여 볼때 모방보다는 표현이라는 말에 더 가까울 듯 싶다. 학에 있어서 시가 시, 음악, 무용 등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면 이들 가운데는 공통성과 차이성이 있어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 의하면 모방의 매재, 대상, 양식에 의거한다. 이들에게 공통되는 요소는 모방의 매재인 소리이며, 이는 율동, 언어, 해음의 셋으로 이루어지며, 이 셋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여러 분야로 분류된다. 율동, 언어, 해음이라는 세 요소는 전부 시간적 계기를 가지고 있어 시간예술을 형성하여 회화나 조각과 같은 공보이고 있다. 시의 기원은 원시적인 두 본능, 즉 모방하려는 본능과 타인에 의해 모방된 것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본능에 기인한다고 한다. 우리는 모방된 사건이 비록 그 자체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이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비극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시의 종류를 구분하고 그 중에서도 비극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요, 쾌적한 장식은 한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되며 서술적 형식이 아니라, 드라마 형식을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정의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화와 균형 등이 이루어진 도덕적인 음악 이외에 열광적인 음악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음악의 목적은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광란적인 정열이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감정이 억압을 받는다. 그러나 광란적인 음악을 듣고 자기 속에서 그러한 감정을 일으켰을 때 이러한 열광적인 감정이 배설된 것처럼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어떤 양식으로든 배설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은 경쾌해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배설적 멜로디(purgative melodies)는 인류에게 악기 없는 쾌락을 준다고 말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도덕적이기보다는 같은 종류의 감정을 자극, 환기시킴으로써 배설하여 경쾌한 정신이 되게 하는 데 그 효용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3. 비극론
잠시 영화의 얘기로 들어가보자. 세익스피어는 당시에 크게 주목을 받던 극작가는 아니였다. 싸구려 술집 창녀와 하룻밤을 보내며, 언젠가 꼭 자신의 영혼을 되 살려줄 여인이 오기만을 믿으며 몇 편의 희곡을 쓰는 하류 극작가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에게 운명처럼 찾아와 줄 여인은 슬럼프에 빠져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한 자신에게 천재적인 영감을 불러줄꺼라고 믿었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자신의 다음 작품을 준비하게 되었고, 그 작품이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 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최초 시작은 평범한 사랑얘기에 풍자를 담은 삼류 희극이였다. 세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희극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정서가 비극보다는 희극을 더 선호하였기 때문이였다. 귀족들과 왕족들은 비극을 싸구려 연극으로 취급하였으며, 연극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였다. 연극을 보는 동안 한없이 웃고 즐기는 것이 더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아픔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에 눈 뜨게 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내적 경험을 통해서 세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희극과 비극에 대한 미학적 대립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를 영화로 만든 것에서도, 에코는 사라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희극과 비극에 대한 대립에 의한 희생이라고 가정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2부는 희극, 즉 웃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는 이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2부는 희극을 다루고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중세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슬람을 넘어서 전해지게 된다. 이슬람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을 이슬람어로 번역하였고 그러한 번역이 다시 프랑스와 유럽으로 역수입하게 된 것이다. 오랜 전쟁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저술이 분실되었고 다시 작성되었다. 그 가운데서 추측컨데 미학 2편은 희극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시에 번역과 출판이 금지되었을 것이다. 중세수도사들과 신학자들의 생각에 인간의 웃음에 대한 도취와 만족은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거스릴 수 있는 행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웃음에 헤퍼지게 되면 감각적 웃음과 쾌락에만 치우치게 되고 신의 계시(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배설, 혹은 분출)"는 희극에서는 웃음으로, 비극에서는 눈물로 표출되며, 자신의 감정을 더욱더 분출하게 만든다. 웃음을 통해서 기쁨은 배가 되고 눈문을 통해서 슬픔은 더 깊어지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대게 슬픔의 미학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슬픔은 자신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말한다. 대중가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사랑을 시작하거나, 이제 막 사랑에 빠진 행복한 연인의 모습과 사랑에 시련과 아픔을 겪는 연인들의 이별의 얘기이거나,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자신에게 의미 있는 내적 반성을 불러일으키는가? 쉽게 말해서 어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극의 편에 손을 들어주리라 생각한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그 이전에 비극의 미적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에 관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의 저서 시학에 따르면, 비극의 흥분은 우리의 감정에 기쁨을 주는 완화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속 시원히 울어버리는 것은 감정의 완화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비극에서 훌륭함을 느끼며 평정한 마음으로 모든 격정을 버린 채 극장을 나오는 것이다. 비극은 여섯 개의 구성요소로 분석된다. 그것 중 세 가지는 모방대상인데, 삶의 구성 플롯이나 부분(인간의 행위나 경험), 인물의 성격(도덕적 특질), 그들이 나타내는 사상성(지적특질)이다. 그 요소 중 나머지 두가지는 사용된 모방수단으로, 조사법과 멜로디이다. 여섯 번째 요소인 장경은 모방양식으로, 이야기가 청중 앞에 무대상으로 나타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요소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성을 가장 중시하여 비극의 생명이며 영혼이라 말한다.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 아무리 심리학적 정교함을 지닌다 하여도 시적, 수사학적 우수함이 없이는 비극을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야기의 핵심과도 같으니까 어떤 모양이나 계획 없이 그림을 그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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