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 소설

 1  위진남북조 소설-1
 2  위진남북조 소설-2
 3  위진남북조 소설-3
 4  위진남북조 소설-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위진남북조 소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 시대는 실제로 위(魏)나라 조조(曹操)가 천하의 권세를 잡았던 동한 헌제(獻帝) 때부터 시작된다. 동한(東漢)은 말년으로 올수록 황족들의 생활이 부패하고 외척(外戚)·환관(宦官)과 관료들 사이의 심한 세력 다툼으로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여 백성들의 삶은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 빠져 있었다. 영제(靈帝)의 중평(中平) 원년(184)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백성들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터진 것이고, 또 이것은 한나라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헌제의 초평(初平) 원년(190)부터 건안(建安)13년(208)에 이르는 19년 동안에는 하루도 전쟁이 멎을 날이 없어 황하 유역 일대는 크게 파괴되어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건안 13년 「적벽의 싸움」이후 나라가 조조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 손권(孫權)의 오(吳)나라로 갈라졌다. 이들은 서로 싸우면서도 서로 국력을 길러 위 나라는 황하 유역의 농업 생산을 상당히 회복시켰고, 촉 나라와 오 나라는 각기 중국의 서남(西南)과 동남(東南) 지역을 개발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위 나라를 찬탈한 서진(西晉)이 서기 280년에 전국을 통일한다. 위 시기의 문학은 예부터 연호를 붙여 「건안 문학(建安文學)」 이라 부른다. 동한 중엽 사회적인 책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던 지식인들, 또는 문학에 있어서의 개성(個性)을 발견했던 문인들의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한대 민가(民歌)의 내용과 오언(五言)의 형식을 발전시켜 문인들이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전개한 시기이다. 이 건안 문학은 조조 삼부자와 이른바 「건안 칠자(建安七子)」 가 주도하였고, 서정시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위 나라에서 문인들이 왕후를 중심으로 모여 문학 활동을 했던 일에 주목을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시대적인 의의가 뚜렷한 왕찬(王粲)의 「칠애시(七哀詩)」와 완적(阮籍) 의 「영회시(詠懷詩)」같은 작품도 나왔다. 서진(西晉)은 태강(太康)년 간의 번영을 누리기도 하였으나, 정치 사회면에서 있어서의 사족과 문벌의 지위가 굳어지고, 이들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극도로 부패한 생활을 하였다. 서진(西晉)은 사족들의 힘을 빌어 정권을 잡고 황족들의 힘을 빌어 천하를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제왕으로 봉했다. 그러한 결과 「팔왕(八王)의 난」 이 일어나고, 연이어 서쪽과 북쪽 각족(各族)들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서기 316년에 서진(西晉)은 망해버렸다. 그러나 서진(西晉)의 일파가 강남으로 옮겨 와 건강(建康, 지금의 南京)에 자리를 잡고 동진(東晉)이란 나라를 지탱하게 되는데, 이후로는 계속 남북이 대치되어 이른바 남북조(南北朝)시대가 전개된다. 위 나라에 이어 서진(西晉)시대에는 사회의 혼란 속에 지식인들은 현실적인 뜻을 잃고 동한 때에 이룩된 도교(道敎)를 반전시켰으며, 지식인들은 현실에 초연하고 방달(放達)한 태도를 지니며 현리(玄理)를 주제로 하는 청담으로 세월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정치뿐만이 아니라 문학까지도 완전히 사족들의 것으로 굳어져 귀족화하고 형식화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의의가 뚜렷한 좌사(左思) 의「영사시(詠史詩)」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하였다. 흉노의 유연(劉淵)이 군사를 일으킨 때(304)로부터 북위(北魏)가 북방을 통일하기까지(439), 북조(北朝)의 130년 간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 부르는 여러 민족의 나라 사이의 대 혼전의 시기였다. 이 혼전으로 황하 유역 일대는 위·진의 정치성과도 남기지 않고 동한 말기보다도 더 철저히 파괴되었다. 북위가 통일한 뒤로 북방의 사회가 어느 정도의 안정을 되찾아 경제와 문화는 발전을 보이는 듯 했으나, 결국은 다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갈라졌고, 뒤에 다시 찬탈에 의하여 북제(北齊)와 북주(北周)가 이들을 계승한다. 남조(南朝)는 동진에서 시작하여, 송(宋)·제(齊)·양(梁)을 거쳐 진(陣)나라가 수(隋)나라에게 멸망 당하기까지 이다. 이들 남쪽의 다섯 나라들 간에 전쟁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역들이 전란에 휩쓸리지 않고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이 때문에 농업과 함께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하였고, 건강(健康)을 비롯한 남방의 여러 도시들이 상업도시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이에 따라 북방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남방으로 이동해 왔고, 남방의 문화는 진일보 발전하게 되었다. 다만 사족과 관료 중심의 정치체제와 불합리한 세제(稅制)와 요역(役) 등으로 말미암아, 귀족들은 사치스럽고 음란한 생활을 하는 한편 일반 백성들은 곤궁한 생활을 해야 하는 모순을 들어내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도교 이외에도 또 동한 때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불교가 성행하였다. 불교의 윤회(輪廻)사상과 인과응보설(因果應報說)은 사회 혼란 속에 고통을 당하던 그 때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이러한 도교와 불교의 성행은 사족들에 의하여 독점된 문학으로 하여금 현실사회를 외면하고 초월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내용에 있어서 성실성을 잃은 문학은 형식 주위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은 문장에 있어서는 더욱 성률(聲律)을 중시하여 내용 면에서 더욱 아름답고 멋진 글을 이룩하기에만 힘썼다. 이 시대에는 오언시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문학활동이 전개되었고 또 그것을 짓는 기법이 매우 원숙해져서 오언시는 가장 대표적인 문학 양식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성률(聲律)을 중시하고 형식미를 추구하여 고시에서 근체시의 시율 발전 시킴으로써 당(唐)대에 이룩된 율시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위(魏)·진(晋) 대에 이르러 서정적인 소부(小賦)로 참신한 맛을 보여 주던 부(賦)도 대우(對偶)를 중시하면서 변부를 발전시켰다. 산문에 있어서도 대우(對偶)가 중시되고 성조(聲調)에 까지도 신경을 써서 변려문 이라는 극도로 수사의 기교를 다한 문체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이 시대는 문장의 사조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형식주의적인 시대였다. 그러나 진(晋)말의 도연명(陶淵明)의 전원시(田園詩)와 송(宋)나라 사령운(謝靈運), 제(齊)나라 사조(謝眺)의 산수시(山水詩) 등은 중국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송나라 포조(鮑照)나 북조의 유신(庾信)등 중국시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할 만한 작가들도 나왔다. 다만 한(漢)대 악부민가(樂府民歌)의 전통은 그대로 계승되어, 건안(建安)년 간에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라는 유명한 장편 서사시가 나왔고, 남조에서는 오가(吳歌)와 서곡(西曲)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연정을 주제로 한 소곡(小曲)들이 성행하였으며, 북조에서는 애정뿐만이 아니라 전쟁이나 현실문제를 노래한 작품들까지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목란사(木蘭辭)」는「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 버금가는 대작으로 알려져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산문 역시 흥성하였는데, 도연명의 자전적 내용을 기술한「대인선생전(大人先生傳)」과「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개인적 일대기를 다룬 전기문학 작품으로 문학적 우수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도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등이 있다. 역사산문으로 분류되는 범엽의「후한서(後漢書)」와 진수의 「삼국지(三國志)」가 있으며, 특히「삼국지(三國志)」는 소설「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관련이 깊어 소설사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리고 소설에 있어서 만은 현실을 초월하려던 당시의 경향이 허구를 발전시키어, 후세 소설의 기반이 된 이른바 지괴소설(志怪小說)을 유행시켰다. 그리고 불교의 성행에 따라 이 시대에 많은 불경이 중국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이 시대의 문학조류와는 달리 문장의 수사는 멀리하고 착실히 뜻을 표현하는데 힘쓰는 문장을 발전시키어 고문(古文) 발전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한편, 불경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불교에 관한 얘기들은 중국문학에 새로운 소설의 발전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문학비평론의 건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유협(劉)의 「문심조룡(文心雕龍)」 종영(鍾嶸)의 「시품」 으로 대표되는 문학론에 관한 저술과, 소통(蕭統)의 「문선(文選)」 , 서릉(徐陵)의 「옥대신영(玉臺新詠)」같은 시문선집(詩文選集)이 나온 것은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는 이 시대의 문학발전에 따른 문학비평의 의식이 구체화한 결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위진남북조 문학사 370년간은 시·산문·악부·비평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암울했던 정치적 상황과 시대적 여건을 발전적으로 극복하고 화려한 꽃을 피웠다.
2. 위진남북조 소설의 특징
소설은 단지 小道에 불과한 개념으로 취급되었다. 소설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소설’이란 결코 의식적인 문학창작이 아니라 짧은 형식의 자질구레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히 소설의 기본형식인 줄거리와 인물, 그리고 구성은 말할 것도 없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중국에서 초보적인 소설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이다.
이 시대에 들어서면 지인, 지괴 소설이 널리 유행한다. 지인, 지괴소설은 비록 인물의 묘사가 선명하고 이야기의 전개가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작자가 의식으로 창작한 것은 아니고, 단순히 전해지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훗날의 소설과는 큰 차이가 있어 본격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 시기의 소설은 문언문으로 쓰여진 단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변려문으로 된 것은 극히 드문데, 그 이유는 당시의 작가들이 소설을 중시하지 않아 붓 가는 대로 기술하고 수식에는 힘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에 대한 개념이 차츰 새롭게 발전하게 된 시기로서 중국소설의 萌芽期다.
지괴는 주로 신선도술이나 귀신, 특이한 사물 등을 서술한 것이다. 괴이한 이야기의 기록인 셈이다. 지괴소설의 발전은 당시 종교 미신사상의 성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학자체의 발전과 누적도 지괴소설이 발전하는 데 한 요인이 되었다. 고대 신화와 역사 전설은 지괴소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데‘산해경’이나 ‘목천자전’같은 책들은 지괴소설에 많은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대혼란의 시대로서 종교 미신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고, 통치자들도 자신들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 미신을 이용하였으며 이런 문학내외적 상황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