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육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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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대교육과 사상
제2절 구국적 민족교육사상가
한국이 닫혔던 문을 활짝 열고 발달된 서양의 문물을 접하기 시작한 19세기말부터 20세기 전반기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고 쇠망과 전략이 소용돌이치는 민족수난기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고종 받는 민중과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정치, 경제, 사회,교육, 종교의 각계각층에서 지도한 선각자들의 이름은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쇠망과 전략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향 잃은 조국과 민족을 내 한몸 같이 생각하고,열성과 진실을 다하여 받들다가 일생을 마치기 일쑤였다. 특히 일제 식민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국적 민족교육실천가들이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 인물 : 한서 남궁 억과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한국 교육의 영원한 사표요, 귀감으로서 20세기 한국의 구국적 민족교육 사상가들이다.
1.한서 남궁 억(韓西 南宮 檍, 1863~ 1939)
1) 생애와 활동
한서 남궁 억의 생존시대는 우리나라가 근대사회로 전진.발전할 수 있는 시대이었는가 하면 일제의 고동을 받게 된 민족수난기이었다.
보수적인 집안의 만류를 뿌리치고서 개화학교에 가서 영어를 배원 최초로 고종의 대 서양정책을 도와주었다. 그 후로는 내부 토목국장에서 시작하여 성주목사, 양양군수에 이르기까지 조국이 부르는 관직이라면 그것이 크고 작음을 구애하지 않고 나아가 상하에 청백을 보이는 모법 관리 인상이였다. 사회로 돌아와서는`[독립협회]`수석총무,`[황성신문]`사장,`교육월보`창간 등으로 독립운동과 사회계몽의 최일선에서 동분서주하였다.국권이 상실되고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되자 한서는 기독교인이 되고, 평교사가 되고, 학교설립자가되고, 시 쓰고,노래 부르며,책을 저술하여 오직 조국광복에 필요한 청소년 교육에 힘쓰다 일복의 감시를 받으며 일생을 마쳤다.
2) 교육사상
남궁 억이 최초로 교육에 관여한 것은 그가 토목국장 재임 시였다. 그는 민영환이 설립한 개화 초기의 민간 사립학교였던 흥화학교에 초청되어 틈틈이 한국역사와 영어도 가르치면서 애국심과 신문화사상을 교육하였다.
한서가 그 자심의 힘으로 학교를 창설한 것은 1906년이었다. 즉, 강원도의 양양군수로 있을 때 가재를 모아 중등 정도의 근대학교를 새웠으니 바로 현산학교었다. 군수인 남궁 억이 설립자 겸 교사 노릇을 한 이 학교는 당시 구국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많은 민족주의 사립학교 중의 하나였으며, 강원도 근대개화학교의 효시이었다.학교 설립의 근본정신은 안창호의 대성학교가`’애국정신에 강한 민족운동자의 양성’`이고 이승훈의 오산학교가’민족운동의 인재양성’인 젓처럼 남궁 억의 현산학교도’국권 갱생의 일꾼양성’`이었다. 물론 아직 보수적이요, 한문 승상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며 첩첩산중의 지방에서 근대학교를 열고 근대학교를 열고 근대교과를 가르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학을 배우면 사람 버린다.”고 하여 대부분의 가정은 아동을 내어 놓지 않고 오히려 방해까지 한 때 이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점 이후에는 기독교 학교를 통하여 민족교육에 이바지할 결심으로 배화학당에 평교사로 취임하여 영어와 국사 및 가정, 웅변, 국문, 서법 등을 가르쳤다. 한편 야간에는 신민회의 기간학교로서 청년의 독립사상 고취에 공헌이 컸던`청년학원`의 교장을 겸하여 밤낮없이 교육에 헌신하였다.당시 배화학당에서 교육이 금지된 우리 역사를 영어문법 시간에 몰래 가르치고, 가정시간에는 `무궁화삼천리`라고 쓴 한국 지도를 동양자수로 정성스럽게 꾸미도록 하는 등 애국적 여성상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배화학당에서 교육하는 동안 과로하여 건강을 잃고, 또 일제관헌의 감시가 심하여 1918년에 교사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로 낙향하여 학교와 교회를 짓고 교육과 전도활동을 계속하였다. 당시 한서는 학교운영자 겸 교사이면서 사환이요, 수위이었다.
`[조선 이야기]`에 한서는 자서를 붙이되 ”…기제는 수삼의 이유”가 있는데,
①단군족의 고유한 재질을 기르고자 함이요,
②옛사람들의 모화주의의 잘못된 생각을 타개코자 함이요,
③학동의 자국에 대한 역사적 취미를 일으키고자 .
한서는 근면과 협동과 생산을 중요시하고 실업교육을 솔선수범하였다.
P.122 남궁 억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한 내용.
이 연설에서 한서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선인이나 일제가 내놓은 그릇된 길을 그대로 수긍하며 따라가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힘써 노력하여서 참 인간, 참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을 스스로 개척하여 한국 민족이 잘못되어 가지 않도록 대학졸업자 여러분이 지도자가 되어 달라는 뜻이다.
한서는 기독교 정신에 의하여 민족교육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기독교에 관심을 두고 철저한 신자가 된 동기는 한 나라의 운명을 붙들어 세우기에는 연약한 인간의 의지나 지혜만으로는 너무나 무력함을 느끼게 된 까닭이다. 그는 결국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좌우하는 또 다른 힘이 작용함을 깨닫고 그 힘이 작용함을 깨닫고 그 힘의 소신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세계인류를 구원하신 것처럼 친히 십자가를 지고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고행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예수가 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P.123 한서가 작사한 찬송가 495(구).402(합동)장.
이 노랫말에서 한서는 예수가 유대국민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방황함을 보고”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탄식하였다. 이 같이 이 대한조국에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참 일꾼이 부족함을 계몽시키고 있다.
남궁 억의 평소 생활상의 특징 그의 교육적 인간상.
P.123밑에서 일곱번째 줄 내용.
한서의 생애와 교육활동 그리고 생활모습을 통하여 민족교육자, 남궁 억의 교육사상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 그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면 다음과 같다.
P.124 일곱째줄
남궁 억은 누구보다도 일찍 개화사상에 이해가 깊은 선각자이었으며 용기 있는 행동인 이었다. 특히 교육적 측면에 있어서 전극대적 교육내용과 방법을 비판하고 민주적이며 근대화된 내용과 방법으로 개선.발달시키는 데 앞장섰다.교육자 남궁 억의 현대적 의의는 교육적 신념을 직접 실천할 수 있었던 점에 있다.
2.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 1938)
1) 생애와 활동
도산 안창호는 평안도 강서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정에서 한문과 유학을 재우다가 17세에 서울로 올라와 구세학당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서양의 문물에 접하여 깨달은 바가 컸고, 바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일찍이1899년에 고향에 점진학교를 세우고 근대교육을 실천하여 교육으로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범을 보였다. 그 후 좀 도 체계 있는 교육운동과 독립은동을 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동포끼리의 협동과 사랑이 부족함을 깨닫고 의식의 계몽에 먼저 힘썼다. 일본을 거쳐 귀국하는 도중 이등박문을 만나보고, 이미 순리대로는 우리의 독립이 때가 늦었음을 깨닫고는,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들어갔다. 그가 신민회의 회원을 모집할 때 첫째 조건이 믿을 만한 사람이요 둘째는 각 도에서 골고루 참여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