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 과정 도전의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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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과 정도전의 문학관

서거정(1420~1492)은 조선 전기의 문신문장가로,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또는 정정정(亭亭亭)이다. 권근의 외손자로,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1457년(세조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에 올랐으며, -이 때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安南使臣)을 만나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 한다-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외조부이자 조선개국 초의 문물제도 확립에 공이 큰 권근(權近)은 서거정의 인격과 학문 세계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시문에 있어서는 권근의 시문풍(時文風)이 서거정에게 연계(連繼)되어 스스로 사장문인(詞章文人)으로서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이같이 권근의 현실주의적 학문과 사상이 서거정에게 점염(點染)되었으므로 서거정의 처세와 학문의 성격 형성은 일찍부터 그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8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여섯 임금을 모시면서 무려 45년간의 관직생활을 했으며, 그 중에 23년 동안이나 당대의 문형(文衡)을 담당하여 조선초기의 문운(文運)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또한 그는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거정은 잡학(雜學)에까지 능력이 인정될 정도로 박학다식(博學多識)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는 『경국대전(經國大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제서류취(諸書類聚)』, 『동인시화』, 『골계전(滑稽傳)』, 『주오자(註吳子)』, 『역대연표(歷代年表)』,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오행총괄(五行總括)』, 『동국통감(東國通鑑)』, 『필원잡기(筆苑雜記)』, 『사가집(四佳集)』 등 많은 관찬서(官撰書)와 개인저술(個人著述)을 남겼다.

고전시화(古典詩話)의 특징은 그 내용 전개에 있어 체계적으로 시론(詩論)을 정립해서 작품을 분석 비평했다기보다는 다분히 인상적인 시비평의 범주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동인시화』도 마찬가지로 그런 범주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는 또한 인상비평이라는 시화의 성격상 극복하기 어려웠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동인시화』가 가지는 이러한 제약성을 인정하면서 단순히 『동인시화』에 나타난 서거정의 문학관을 살펴보도록 한다. 『동인시화』에서 서거정이 시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동인시화』 하권에 보면,
“시라는 것은 작은 재주라고 하겠으나 혹 어떤 시에는 세교에 관계되는 것도 있으니 군자가 마 땅히 취해야 할 것이 있다. 어찌 소기라고 하여 소흘히 하겠는가.?詩者小技 然或有關於世敎 君 子宜有取之 是焉可以小技而少之哉)
라고 하여 시를 단지 소기(小技)라고 말하고, 시에 있어서는 세교(世敎)에 관한 것을 취할 만하다고 했다.
시에 대한 서거정의 이같은 생각은 고려 말기 불교에 의한 피폐한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도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신봉되던 조선 건국 초의 사상적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기(小技)’라는 말은 역대 중국 문인의 글이 서거정 이전의 고려 학자들의 글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서거정이 그대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경전을 바탕으로 삼고 있던 유교사회에서 경전 이외의 모든 것을 낮추어서 일컫던 관습에 의해서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위의 글에서 서거정이 세인들을 교화하는 도덕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시만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시가 나타내고 있는 다양한 내용 가운데 세교라는 시의 효용성을 강조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문집인 『사가집(四佳集)』에 실려 있는 시편들 대부분이 세교적 내용보다는 당대의 화미한 사회적 분위기와 개인의 정서를 화려하고 진솔하게 나타내는 데 충실했다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동인시화』속에서 문학의 사장적(詞章的)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 들어가 과거에 올라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학 사(學士) 박인범(朴仁範)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 등의 시가 중국의 에 모두 실려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시로써 중국에 이름을 떨친 것은 이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 었으니, 문장이 이처럼 나라를 빛낼 만하였다.?崔文昌侯致遠 入唐登第 以文章著名 …朴學士仁 範 …朴參政寅亮 …方輿勝覽皆載之 吾東人之以詩嗚於中國 自三君子始 文章之足以華國如此.)
서거정은 위에 인용되고 있는 문인들의 작품이 사상적 편향성보다는 개인의 보편적 정서에 충실한 내용을 지니고 있고, 더욱이 표현대상을 그려내는 표현 기법이 뛰어나 문화적 선진 대국인 중국 사람들을 감동케 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위에서 예거하고 있는 최치원의 『제 윤주 자화사(題潤州慈和寺)』와 박인범의 『제 경주 용삭사(題涇州龍朔寺)』, 박인량의 『제 사주 구산사(題泗州龜山寺)』 등의 시들이 표현 대상물에 대한 미적 형상화가 전범이 될 만하고, 나아가 정치(精緻)하면서도 적실(的實)한 표현 기법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서거정이 이러한 시들이 중국에 널리 알려짐으로써 우리 나라의 문화적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 것에서 문학에 대한 그의 이해와 관점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동인시화』에서 작품을 창작함에 있어 진부한 내용과 모방, 형식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찬순 역, 『동인시화』, 한국문화사, 1996.
김풍기 저, 『朝鮮傳記文學論硏究』, 太學社, 1996.
박성규 역, 『동인시화』, 集文堂, 1998.
이종묵 외 3인 공저, 『서거정 문학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이현재 발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