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son Agonistes

 1  Samson Agonistes-1
 2  Samson Agonistes-2
 3  Samson Agonistes-3
 4  Samson Agonistes-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Samson Agonistes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Samson Agonistes
(P.79)
1640년대 초반 밀턴은 비극에 관한 개요를 7페이지에 걸쳐 썼다.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에 대한 상세한 개요와 함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역사, 성서드라마, 그리고 삼손의 성경인물에 대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 등 원천 출처인 사사기 15장, 16장에 대한 메모를 포함한 여러 가지 주제가 있었다. 밀턴은 적절한 주제와 제목을 적었는데 ‘Samson pursophrus or Hybrists’ 즉, 분쟁선동자 삼손, 또는 폭력배 삼손 이라는 것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Samson marriing or in Ramath Lechi 였다. 또한 신에 대한 옹호로 삼손이 행하는 신성하지 못한 의식을 뜻하는 ‘Dagonalia 라는 기록도 있었다.
아마도 밀턴은 삼손의 삶에 대한 극적인 삼부작을 구상했을지도 모르고 삼손의 다층적인 인물특성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밀턴이 자신의 마지막 시적 과업을 위해 고른 제목인 Samson Agonistes 는 그리스어에서 따왔으며, 그 의미는 운동 경기에서 투사로서의 삼손, 투쟁가 삼손, 승리자 삼손이다. 고전과 히브리문화, 삼손은 밀턴이 문학적인 힘으로 추구했던 이 두 가지 위대한 전통을 융합시킨다. 그러나 어떤 요인으로 하여금 삼손이 영웅이 된 것인가? 극의 진행과정에 이러한 의문점이 전개되면서, 밀턴은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가 끝없이 떠오르는 그의 시만큼 복잡한 이 드라마에 개인적이면서도 국가적이고, 신성한 이야기를 함께 짜 엮는다.
Champion of Christian Violence?
(P.85-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희곡과는 다른 점이 있다. Samson Agonistes에서 코러스가 지혜의 보고인지 아니면 즉석의, 때를 잘 맞춘 응답 모음인지 불분명하다. 비평가 노스롭 프라이는 삼손에 나오는 코러스를 소심한 웅얼거림과 같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치아조직이 느슨한 엉터리 시). 사뮤엘 존슨이 극 형식을 고전적인 5막 구조로 나누었지만, 그 또한 이 작품에는 행위(action)가 부족하고 중간이 결여된 서론과 결론만 있다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1막과 마지막 사이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극 구성의 실패와 코러스의 불신임이라는 이 두 가지 고전희곡 전형에서부터의 탈선은 작품을 기독교화 하려는 밀턴의 계획일지도 모른다. 코러스의 지혜는 밀턴의 묵시록적인 세계관에선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오직 신만이 신의 뜻을 알고 있고, 삼손은 극이 진행되면서 코러스의 인식보다 더 크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사건의 측면에서 보자면, 주목할 만한 사건의 부재 자체가 바로 핵심이다. 주요한 극적 액션은 삼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후회와 갱생이라는 기독교적인 구원의 틀에서 나오는 영적경험인데 이는 위대하고 영웅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외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삼손이 최후에는 신에게로 회귀했는지, 그의 행위가 정말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단지 고문을 당한 죄수가 광적으로 폭발한 것일 뿐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어찌 되었건 자살은 기독교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비록 마노아와 코러스가 극의 결말을 신의 가호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들은 극의 진행과정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 잘못되었다. 코러스와 아버지가 단지 자기위로로 끝내는, 이해할 수 없는 엔딩 부분은 밀턴이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의도로 극을 썼다는 동기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만약 밀턴이 작품을 교정하면서 외적인 행위를 내적인 것으로 대체한 것이라면, 그 기독교화는 우리가 갈망하는 도덕적인 확신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연극의 기대감을 좌절시킨다. 그러나 신의 길과 방식에 대한 불확실성이야말로 믿음의 조건이 된다.
행위(action)의 전통적 유형을 새로 고친 것과 더불어, 밀턴의 서문 또한 이 드라마가 결코 무대에 상연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인쇄술의 시대에 독서의 힘을 의식했음을 밀턴은 다른 방식으로 내재화하는데, 즉 이 드라마가 신자들의 마음에서 공연되길 원했다. 드라마가 고전비극의 대규모상연이나 퇴폐적인 왕정복고문화의 공적 무대에서부터 나오는 거대한 도덕적인 주제의 표현을 위해 토론회로 다시 자리매김하면서, 밀턴은 사적이고 내면에서 투쟁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비극이 감정의 배출구를 제공함으로써 치유의 장이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인용하면, 만약 밀턴이 치료의 힘이 있는 비극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가정과 정신의 사적인 공간에서 글을 읽으면서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비극론을 원용하자면 비극은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가 될 수 있고, 밀턴은 드라마의 영적기능을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비극은 분쟁과 양가성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대화문답을 자아낸다. 밀턴의 삼손은 영웅과 동시에 희생자가 되고, 수난을 구제한 희생자가 되었지만 또한 격정으로 가득 찬 추방되어야만 하는 자가 됨으로써 드라마의 체험을 구현한다.
만약 삼손으로 전환한 것이 히브리(*유대교,구약)나 과거 공화정으로의 우회라면, 그것은 또한 기독교인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삼손은 17세기 독자들에게 예수의 한 전형으로 익숙하다. 단지 비유적인 표현만 아니라, 억압받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추종자들을 위해 해방을 이룬 순교자로서 말이다. 삼손을 방문한 3인은 예수에게 닥쳤던 3가지 유혹을 의미한다. 그러나 드라마의 폭력적인 결말은-영웅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자살의 가능성도 제기되는 결론- 압제자와 적들에게 다른 쪽의 뺨도 내밀도록 하게 했던 예수의 상과 초기 근대의 프로테스탄트 저항 이론의 원천이 되어온 현실의 군주와 관련된 평화주의자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장 1,2절에서 바울은 설교한다.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삼손의 맹렬한 성상파괴(*밀턴은 처형당한 왕에 대한 동정적인 분위기를 깨기 위해 ‘왕의 성상’을 비판하는 ‘우상파괴자’를 썼음)는 세속의 군주들을 안심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삼손이 압제자에 대항하는 영광스러운 지도자라면, 오늘날 다른 독실한 사람들에 의해 그의 행동은 어떻게 모방되어 지는가? 더 넓은 차원에서 이 극은 물어보는 것 같다. 만약 적에 대항한 폭력적인 복수가 영웅의 무용이라면, 역사에서 신의 길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이 영웅의 가혹한 본보기에 의해 제기된 ‘기독교’에 관한 의문들은 Samson Agonistes가 수록된 서적의 두 가지 성향에 의해서 두드러진다. 하나의 권집에 수록된 2개의 시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8절판의 타이틀 페이지에 삼손을 추가한다는 글귀를 적은(*마지막장 그림참조) 밀턴의 뻔뻔함은 삼손 작품이 독자들에게 책 가격에 합당한 가치를 주려고 나중에 덧붙인 극작품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하지만 드라마에 붙여진 두 번째 표제는 그 작품의 진가를 암시한다. 삼손은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은 건장한 영웅으로, Paradise Regained의 호리호리한 예수인 정신적인 영웅과 차이를 보인다. 이는 기독교의 구약과 신약 사이의 명백한 인식의 차이를 대조한다. 이 두 시는 아마도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사탄의 유혹을 소극적으로 견디며 결코 보복행위로 굴복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인 행위자로 말미암아 복수가 피비린내 나는 잔혹함으로 변하는 것이다. 삼손은 예수, 즉 진정한 구원자의 전형으로 보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거짓 예수의 전형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Paradise Regained 는 첫 인상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덜 평화주의일 수 있다. 신의 창조적인 힘과 백성을 돌보심은 그의 파괴적인 힘과 연관되어 있지만 밀턴의 드라마는 신성한 힘을 지닌 인간의 가치에 대한 평가에선 불안정하다. 여전히 밀턴이 두 작품을 어떤 쪽으로 서로 연결시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기독교 유형학 Typology: 신적인 영감을 받아 쓰여진 성서(聖書)가 총체적이고 일관된 체계를 가졌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에 일치하는 전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교회에서는 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세계의 구원자라고 인간들에게 알리고 이해하게 하는 방법으로써 구약에서 이미 성서의 저자들에게 계시를 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성서는 베일에 가려진 신약성서와 같고, 신약성서는 베일이 벗겨진 구약과 다르지 않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