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 쾌재 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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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주 쾌재 정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황주쾌재정기
I.작가 소개
소철 蘇轍 [1039~1112]
당송팔대가인 중국 북송(北宋) 때의 문학자이다. 자 자유(子由). 호 난성(欒城). 메이산현 [眉山縣:四川省 남쪽에 있던 현]에서 출생했다. 소순(蘇洵)의 아들로 19세 때 형 소식(蘇軾:東坡)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정계로 들어갔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지방관리로 좌천되었다. 소식과 두 살 차이가 났지만 문단적인 지위는 거의 비슷하였다. 문학의 풍격을 비롯해 벼슬의 경력 불우한 체험 등이 거의 비슷하였다. 소철은 완강한 보수파로서 한 때는 지방관으로 한 때는 귀양살이를 하였지만 철종(哲宗) 때 구법당(舊法黨)이 정권을 잡자 우사간(右司諫)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신법당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 레이저우[雷州]로 귀양갔고, 사면된 후에는 허난성[河南省]의 예창(穎昌)에서 은거하였다.
그는 선천적인 재성(才性)보다는 후천적인 기의 배양으로 기가 충만해 지면 그것이 밖으로 넘쳐 언어를 만들고 문자를 만든다는 곧 학력의 연마ㆍ기성(氣性)의 수양을 강조했다.
소철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고문을 제창한 산문가 중 한사람이다. 이것은 그의 양기설(養氣設)을 보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난성집(欒城集) 50권을 남겼는데, 남긴 자유(子由)의 산문은 대체로 의론문(議論文)과 기서문(記敍文)으로 양분된다. 그리고 이것을 문체로 볼 때 론(論)ㆍ서(書)ㆍ서(序)ㆍ유기(游記)가 포괄하여 볼 수 있다.
이때, 의론문에는 < 육국론(六國論) >ㆍ< 삼국론(三國論) > 등이 있고, 서찰(書札)에는 < 상추밀한태위서상(上樞密韓太尉書) >, 서(序)에는 < 관유안화찬(管幼安畵贊) > 등이 있다. 또, 유기(游記)에는 < 황주쾌재정기(黃州快哉亭記) >ㆍ< 무창구곡정기(武昌九曲亭記) > 있고, 전(傳)에는 < 소곡전(巢谷傳) >ㆍ< 맹덕전(孟德傳) > 등이 있다.
즉 그는 설리(設理)ㆍ서경(敍景)ㆍ사인(寫人) 등의 부분에서 그의 역량을 발휘하였는데, 설리적인 의논문은 소식이 일사천리(一瀉千里)데 반하여 자유(子由)는 일파삼절(一波三折)을 그 특성으로 삼았다. 여기서 일파삼절이란 곧 문장의 곡절을 반복하여 사리를 간파하고, 내용의 경중에 따라 지엽(枝葉)을 분별하는 일로, 서경문(敍景文)은 마치 사의(寫意)적인 산수화처럼 시정을 풍기고, 전지(傳志)는 소설을 방불케 하는 구성을 갖추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 가운데서 < 상추밀한태위서상(上樞密韓太尉書) > 와 < 황주쾌재정기(黃州快哉亭記) >를 최고의 걸작으로 치고 있다.
소철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注釋書)와 《난성집(欒城集)》(84권) 《난성응소집(欒城應詔集)》 《시전(詩傳)》 《춘추집전(春秋集傳)》 《고사(古史)》 등의 저서를 남기었다.
II. 작품 해석
황주쾌재 ‘쾌재(快哉)’는 ‘상쾌하구나’ 라는 의미
정기(黃州快哉亭記)
黃황 州주 快쾌 哉재 亭정 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