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 김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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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서 김억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안서 김억론
1) 김억의 생애
1896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본명은 희권(熙權)이고, 필명은 안서(岸曙)이다. 지주 가문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여덟 살에 결혼하였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는 신학문 수업을 받게 되었다. 입학 시기는 명확치 않으나 열한 살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하지만, 부친이 사망하면서 수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16년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제자였던 김소월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문단에 진출 시켰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 잡지인 에 1914년 창작 시 ‘이별’, ‘미련’ 등을 발표하고 서구 문학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18년 에 프랑스러시아 문학을 중심으로 서구 문학을 번역소개하고 창작시를 발표했다. 1920년에는 남궁벽 등과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동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또한 에스페란토 어를 보급하기위해 노력했다. 1920년 백남규 등과 함께 서울에서 에스페란토 회를 발기하였고, 에스페란토 어에 대한 글과 에스페란토 어로 직접 창작한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민요시, 시조 창작을 주도하는 민족문학 진영에 서서 카프의 계급 문학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 등의 편집 동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던 그는 1924년 ‘동아일보’의 문예부장 직을 맡았고, 이듬해인 1925년에는 을 창간하여 약 1년간 직접 편집 책임 일을 담당했다. 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 면모를 알 수 없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매일신보’ 문예란을 담당하였고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중앙방송국에서 근무하였다. 여덟 살 때에 결혼했던 부인은 1936년에 사망하였고 1944년에 신인순 씨와 재혼하였다. 1946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는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상고에서 강의를 하였다. 6.25 사변 때 북으로 납치되었고, 1952년에는 북한에 의하여 출판사 교정원으로, 1954년에는 신병으로 요양소에 입소하였다. 1956년 7월, 북한의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강제 임명 되었으나 1958년 평북 철산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후의 그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여러 잡지와 동인지에 발표되었던 번역시들을 모아 그는 최초의 역시집 (1921) 김억(金億)의 역시집으로 1921년 3월 20일 광익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시집인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집이다. 내용은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김억이 , , 등을 통해 발표하였던 역시들을 한데 모은 것으로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 등 21편, 구르몽의 ‘가을의 따님’ 등 10편, 사맹의 ‘반주(伴奏)’ 등 8편, 보들레르의 ‘죽음의 즐거움’ 등 7편, 예이츠의 ‘꿈’ 등 6편, 기타 시인의 작품으로 오뇌의 무도곡 속에 23편, 소곡(小曲)에 10편 등 모두 8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는 최남선으로부터 끊임없이 모색되어 온 한국 자유시가 그 형태를 갖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인정된다. 또한 이 시집 전체에서 느껴지는 가늘고, 여리고, 애달프고 서러운 감각은 권태, 절망, 고뇌를 거쳐 나타나는 병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1920년대 전기 우리 시의 체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를 발간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1923)를 시작으로 (1925), (1929). (1941), (1947), (1948)을 상자하였다. 번역 시집으로는 이외에 타르고의 시를 번역한 (1923), (1924), (1924), 아서 시몬즈의 시를 번역한 (1924), 한시를 번역한 (1934), (1943), (1944), (1944), 양주동과 공역한 (1944)이 있다.
2. 작가의 경향
시 경력은 1924년을 전후 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자유시 형, 외래지향, 서구 시의 번역 김억은 원시(原詩) 그 자체를 완전하게 옮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역시(譯詩)들에서 "번역은 창작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역자가 원시(原詩)의 시상(詩想)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의 창조적 개성을 살려 새로운 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김억에게 있어 번역은 원작가와 역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창작이다. 그리하여 번역은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번역과정에서 역자는 창작적 소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창작적 소질은 일종의 영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시인-역자의 창작에서 재발견된다.
김억의 베를렌느와 보들레르 번역을 살펴본 결과, 김억은 두 시인들의 시를 통해서 자극을 받고, 우리말에 새로운 시어와 이미지들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김억의 강한 실험적 경향은 시어에 있어서는 행절반복, 고정된 음절수 유지 등의 현상이고, 음절수의 경우에는 역시(譯詩)에서 행절반복, 한자 사용 등을 통한 음절수의 유지 등이 그것이다. 내용 측면에서는 김억이 무엇보다도 원시(原詩)의 분위기를 동양화(化)시켜 역시(譯詩)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원시(原詩)의 내용을 옮기는 과정에서 김억은 자신의 해석과 창작적인 경향을 덧붙이고 있다.
, 소개인 반면 후기는 소위 격조시형, 전통지향, 고전 및 한시의 번역과 소개로 볼 수 있다. 김억이 지신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시풍을 확립한 것은 제13호에 ‘겨울에 황혼(黃昏)’, ‘나리다 눈’,‘유월(六月)의 낮잠’연작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초기의 김억은 외래 지향적인 단면을 강하게 드러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 초기에 있어서 김억은 주로 상징주의 수입과 관련하여 자유시, 산문시를 모색하면서 그의 시세계를 탐구하였다. 근대 시인들의 장르 의식의 결여로 시적 인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은 물론 근대시 전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에 대해 말하면서 불란서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 번역을 빼놓을 수 없다. 즉 보들레르, 베를렌 및 아일랜드의 예이츠 등에서 나타나는 우울하고 고독한 정서는 19세기의 상업주의에서 소외된 문학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향을 대변한 독자적인 미의식에 해당된다. 이러한 미의식과 일제 식민지 차하의 젊은 문학도였던 김억의 내적 번민과는 상당 부분 통하는바가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같은 형식의 실험은 김억의 서양 문학적 교양과 학문적인 소양이 어울린 결과로 추측되며, 동시에 우리 고유의 민요 또는 속요에 관한 민감한 시적 수용과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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