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론 생애 및 활동 1908~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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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치환 론 생애 및 활동 1908~1967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청마(靑馬) 유 치 환
1. 생애 및 활동 (1908 ~ 1967)
청마는 1908년 7월 14일 경남 통영에서 유생인 유준수의 8남매 중 2남으로 출생했다. 유치환은 그의 형인 유치진과 함께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1세 때까지 한문을 배웠는데 이 때 배운 한문은 그의 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도일하여 도쿄 도요야마(豊山) 중학에 입학했다. 중학교 무렵 그가 탐독한 책은 주로 도쿠로미 로카의『자연과 인생』과 니체, 파스칼 등 이었다. 1923년 간토대지진 후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그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이 무렵, 토성회의 멤버로서 동인지『토성』에 시를 발표한다. 그러나 가운이 기울어 귀국, 1926년 동래고등학교 5년에 편입하고 이듬해 졸업,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다음해 초등학교 동창 권재순과 혼인을 하고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당시 유행하던 아나키스트 시인들의 작품에 공감하고 정지용의 시에 감명을 받아 고향에서 1930년 회람잡지 를 만들어 시를 발표했다. 1930년 제 2호에 시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고 1937년 문예동인지 를 부산에서 간행했으며 1939년에 친하게 지내던 김소운의 도움으로 첫 시집『청마시초』를 간행했다. 이 시집에는 초기의 대표작인 등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940년 북만주로 이주하여 동랑의 처가 소유한 농장을 관리했는데, 그곳의 벌판을 배경으로 ‘허무의 의지’의 시를 쓰게 된다. 이 만주체험은 청마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대목으로 파악되며 등 그의 제 2시집인 에 수록된 시들이 이때의 소산이다. 1945년 6월 말 시국의 위협을 느낀 그는 다시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여중교사가 되었다. 1947년에 그 동안에 쓴 시 등 59편을 모아『생명의 서』를 펴내고 청년문학가협회 제 1회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1948년 제3시집『울릉도』를 발간한 후 1949년 제 4시집『청령일기』를 펴낸다. 이 시기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와의 정신적인 사랑은 20여년 간 지속되는데 이를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에의 헌신으로 표현했다. 유치환이 이영도 시인에게 쓴 서간집 (1967)에 나타나 있다.
1950년 6ㆍ25 동란이 일어나자 육군 제3사단에 종군하였는데 그는 당시 최전방으로 종군한 유일한 시인이었다. 1951년 9월에는 직접 목격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종군시집『보병과 더불어』로 엮고, 1953년 고향으로 돌아가 수상록『예루살렘의 닭』을 발간했다. 1954년 교육계에서 처음으로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또 초대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청마시집』 이 시집은 와 의 합본인데, 청마는 이를 두 권의 시집으로 간주한다.
을 발간, 1955년 경주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고 그해 12월에『제9시집』을 발간했다. 1958년에 제 5회 자유문학상 수상, 12월에 을 발간했다. 1959년에 수상집 , 자작시 해설집 를 발간하고 같은 해 자유당 말기라는 현실 속 비판적 교육자로 미움을 사 경주중고 교장직을 내놓게 된다. 1960년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발간하고, 1961년 경주 여중ㆍ고 교장에 취임했으며 1962년 제 7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고 대구여고 교장으로 옮겼다. 1963년 수상집 를 발간하고 이듬해 경남여고 교장으로 옮겨서 시집『미루나무와 남풍』을 발간했다. 1966년 516 후에도 계속되었던 정부의 권력 비리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부산 남녀상고 교장으로 전임, 같은 해에 시집『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간행하였다. 1967년 2월 13일 청마는 예총 모임에 참석했다가 귀가 도중 부산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2. 사상과 특성
1) 생명파
‘생명파’는 동인지 「시인부락」의 동인들과 유치환의 시적 태도의 유사성으로 인해 함께 분류되었다. 이는 유치환이 ‘삶(生)’이라는 보다 큰 가치를 추구하는 시작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명파로 묶이는 서정주, 오장환, 김동리, 유치환 등의 시에서는 강렬하고 독특한 본능적인 욕구, 도덕적 갈등, 시대의 인식 등이 함께 융합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유치환은 형이상학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우주적 교감과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하면서 시대의 불행도 함께 의식한 시를 썼기에 우리 현대 시사에서 인생과 사회의 부조리에 윤리 의식으로 대결하며, 형이상학적 지향을 보인 최초의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청마는 「시인부락」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서정주와 비교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선, 인간과 인생 자체의 본질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시인을 인생파, 혹은 생명파로 묶은 것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시인은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서정주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된 본능적 충돌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 주는 데 반해, 유치환은 생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허무와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의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서정주의 시에서는 관능적인 성격이 강한데 반해 유치환의 시는 사변적(思辨的)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2) 시의 부정
당대의 그 어떤 시인보다 많은 총 14권의 시집을 출간한 청마는 정작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술회를 하였다.
나의 시는 내게 있어서 언제나 제이의적(第二義的) 가치 밖에 가지지 않았고 그것은 언제나 인생에 대한 나의 사유하고 느끼는 바를 표현하는 구실을 하는 것 밖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나는 심히 대담하게도 ‘나는 시인이 아니다’ ‘진실한 시는 마침내 시가 아니어도 좋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유치환『구름에 그린다』(1959) p.148
유치환은 ‘진실하지 않은 시(시이어야 하는 시)’와 ‘진실한 시(시가 아니어도 좋은 시)’ ㆍ일반적인 시 : 문학에 대한 이론을 갖고 여러 방법을 연구해서 쓰는 시, 인생에 대한 사유나 느끼는 바가 없는 시
참고문헌
※ 참고 문헌
오세영(2003), 한국현대시인연구, 도서출판 월인
김봉군 외(1997),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조남익(1993), 한국현대시해설, 미래문화사
문덕수(2004), 청마유치환평전, 시문학사
정경주 외(2005), 현대시 필수 아이템, 디딤돌
유수진(2003), ‘유치환의 삶과 시의 특질 연구’, 나랏말쌈
임수만 외(2008), ‘청마 유치환의 고독과 생명에의 열애’, 한국시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