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의 최종 심급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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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알튀세르의 최종 심급 개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
1.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 개념은 글룩스만에 의해서 다양한 심급들 사이의 누빔점(point de caption)을 상실한 다원주의(pluralism)로, 데리다에 의해서는 역으로 초월적 정박점에 준거하는 형이상학으로 비판받는다. 이 두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2.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에 등장하는 “결정”이라는 말은 인과적인 용어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의 특유한 인과성, 즉 구조적 인과성(structural causality)의 개념을 알아보아야 한다. 철학사에서 전통적인 인과성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데카르트적인 선형적/기계적 인과성과 헤겔의 표현적/유기적 인과성이 그들이다. 전자는 개별적 운동의 연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전체-부분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후자는 전체-부분의 유기성을 인정하는 대신 그 둘의 인과관계를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두 인과성 모두 원인과 결과가 ‘서로의 바깥에’ 있으며, 이점에서 원인은 결과에 ‘초월적’이거나 ‘외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의 “상연(Darstellung)" “Darstellung”은 “상연”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상연과 재현(Vorstellung) 사이의 차이는 재현이 연극의 원본(작가, 그리고 그의 의도와 관념)을 연극의 ‘바깥’에 위치시킴으로써 연극을 하나의 독자적인 현실로 사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반면, 상연은 연극을 하나의 현실로서, 즉 ‘작가 없는’ 현실로서 사고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상연은 그렇게 해서 “주체도 목적(들)도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가 표현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개념을 따라, 전체와 부분들의 관계를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인과율을 제시한다.
‘상연’은 ... 맑스가 부재와 현전 양자 모두를 동시에, 즉 자신의 효과 내에서 실존하는 구조를 지시하길 원했을 때 그가 목표했던 가장 근사치의 개념이다 ... 구조는 경제적 현상들에 다가와서 그것의 측면들, 형식들과 관계들을 변형하는, 그리고 그것들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부재하는 하나의 부재 원인으로서 그 현상들에 효과를 미치는, 경제적 현상들의 바깥에 있는 본질이 아니다. 구조의 그 효과들에 대한 ‘환유적 인과율’ 안에서 그 원인의 부재는 경제적 현상들에 관련된 구조의 외부성의 잘못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효과들에 대한 구조의, 내부성의 구조로서의, 바로 그 형식이다. 이는 그러므로 효과들은 구조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들이 어떤 미리 존재하는 대상, 즉 그 안에 구조가 도착하여 자신의 자국을 남기는 요소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반대로, 그것은 그 용어의 스피노자주의적인 의미에서 구조가 자신의 효과들에 내재적이라는 것을, 원인이 자신의 효과들에 내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구조의 전체 실존은 그것의 독특한 요소들로 구성될 뿐, 자신의 효과들 바깥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3. 알튀세르가 스피노자를 경유하며 제시하는 구조적 인과성은 결과에 대한 원인의 내재성으로 규정된다. 즉 결과의 ‘속에’ 원인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를 내재적 인과성(immanent causality)이라 부른다. 이에 따르면 원인은 필연적으로 항상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으며 결과 없는 원인, 곧 라이프니츠식의 ‘가능한 원인’은 불가능하다. 알튀세르의 원인 즉 구조는 자신의 효과들에 내재한다. ‘원인으로서의 구조’란 효과들이 특정하게 관계 맺는 구체적 양상, 즉 구조의 요소들 사이의 분절(articulation)의 특이한 상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인으로서의 구조’는 효과들이 구성하는 ‘표면(surface)’에 존재한다.
4. 구조적 인과성에 의한 ‘결정’은 효과의 가시적 측면의 결정, 즉 내용적 결정이 아니다. 이런 결정은 구조주의자들이 이미 제시한 것으로 전혀 새롭지 않다. 구조적 인과성이 결정하는 것은 가시적 효과에 내재하는 비가시적 측면이며 그 결정은 이런 의미에서 ‘형식적’이다. 표면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래서 구조적 인과성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징후적 독해(symptomatic reading)가 요구된다.
5. 알튀세르의 문제는 항상 ‘모순의 복잡성’이었다. 이 문제가 성립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모순들의 여러 종별적인 실존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헤겔과는 달리 알튀세르에게 모순의 복잡성은 단순한 기원적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이 아니다. 알튀세르는 주요 모순과 그것의 주요 측면이 항상 ‘미리 주어진 복잡하게 구조화된 전체’ 속에서 부차적 모순들과 부차적 측면들에 의해 과잉결정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요 모순과 그 주된 측면이 어쨌든 ‘주요’한 것인 한, 그들은 ‘미리-주어져-있음’으로서의 부차적 모순과 그 측면들에 대해 우선성을 가지며 이는 곧 여러 심급들 사이의 ‘위계’가 성립하는 사태와 다르지 않다. 이런 위계는 알튀세르에게 있어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결국 모순의 복잡성이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의 구별을 함축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과잉결정을 도입하는 한, 최종심급의 개념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최종심급 없는 과잉결정이란 넌센스이다.
6.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정신분석적 과정인 전치(displacement)와 응축(condensation)으로 구성된다. 응축과 전치는 각각 언어학적으로 ‘은유(metaphor)’와 ‘환유(metony)’에 해당한다. 은유와 환유는 기표에 의해 발생하는 의미작용의 사슬들이 무의식에서 형성되는 방식을 분석하고, 어떤 언어법칙들에 따라 그것들이 의식적 의미작용을 하는지 산출하는지에 대한 분석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너무나 유명한 라깡의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테제의 의미 이들을 통해 밝혀질 수 있다. 소쉬르/야콥슨의 영향을 받은 라깡은 인간이 인식하는 언어가 은유와 환유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은유와 환유는 소쉬르의 계열체, 통합체와 대응한다. 은유는 유사성에 의한 대체이며, 이점에서 압축이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이 불타고 있어.’라는 문장에서. ‘불타다’는 ‘사랑하다’는 말을 대체한다. ‘불타다’와 ‘사랑하다’는 ‘뜨겁다’라는 공통요소를 함께 중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압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은유로 이루어져 있다. 꿈에 등장하는 요소들은 본래의 무의식의 욕망을 대체해서 나타난다. 환유는 인접성에 의한 대체를 뜻한다. ‘한 잔 하자’는 문장은 대표적인 환유다. ‘잔’이 ‘술을 대체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없지만 잔을 드는 것은 술을 마시기 전의 인접한 단계이다. 은유가 꿈의 언어라면, 환유는 징후의 언어이다. 징후는 무의식을 드러내지 못하고 인접되어 있는 다른 기표로 계속 치환된다.
두 과정은 알튀세르의 변증법을 잘 묘사한다. 이들은 순탄한 결합의 과정이 아니라 왜곡을 수반하는 폭력적 과정이다. 부차적인 모순은 전위에 의해서 주요 모순과 자리를 바꿀 수 있다. 또한 부차적인 모순은 응축을 통해 이질적인 모순들과 융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왜곡에 의해 모순들에게 ‘부차적인 것’의 지위와 ‘주요한 것’의 지위가 할당되고 재할당된다. 그러므로 지배적인 심급(=주요 모순)을 최종심급(=고정된 기본 모순)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배적 심급의 고정 및 다양한 모순들 사이의 관계 그 자체를 고정하는 것이다.
심급들의 위계를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 각각의 심급에 그것의 본질과 역할을 부여하고 그들의 관계들의 보편적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경제주의’(기계론)이고 진정한 맑스주의의 전통이 아니다. 과정의 필연성이 ‘상황에 따른’ 배역의 교환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배역과 배우를 영원히 일치시키는 것이 경제주의이다.
사전에 영원히 최종심급에서-결정적인-모순과 지배적 모순의 역할을 동일시하는 것, 항상 이러저러한 한 ‘측면’(생산력, 경제, 실천)을 주요 역할에 동화시키고 또 이러저러한 또 다른 측면(생산관계, 정치, 이데올로기, 이론)을 부차적인 역할에 동화시키는 것이 경제주의이다 - 반면에, 실재의 역사 속에서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은 정확히 경제, 정치, 이론 등의 사이에서의 주요 역할의 치환 속에 행사된다.
많은 이들이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의 “최종”이라는 말에 집착하여 그것을 비가역적/고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란 전치와 응축이라는 가역적/역동적 과정을 그 본질로 한다. 또한 비판가들은 “경제”라는 말에 히스테리적으로 반응하면서 알튀세르가 낡은 경제주의나 볼셰비즘적 생산력 예찬으로 허무하게 돌아간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에 의한 결정’은 “실재의 역사” 속에서 “경제, 정치, 이론 등의 사이에서의 주요 역할의 치환”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경제에 의한 결정”이란 경제 영역 자체의 독자적 결정이 아니라, 이질적 모순들의 역할이 다르게 분배되는 과정, ‘자리 바꾸기’의 과정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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