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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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카프카의 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Ⅰ. 카프카의 생 이 유 선 : 동덕여대교수, 한국카프카학회 회장
1. 들어가며
20세기의 대표적인 독일어권 산문작가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자신이 속한 모더니즘을 넘어서 현재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토론의 場에서도 중요한 고찰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설정의 부재는 시공간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한한 비유, 해석가능성과 더불어 범세계적인 수용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의 작품의 은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는 카프카 개인이 처했던 상황으로부터 기인된다고도 볼 수 있다.
2. 프라하 : 삶 작품 언어 종교 직업
그는 유대인으로 당시 프라하의 사회적 정신적 상층계급이었던 독일인 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 독일어학교를 다닌 독일문화 수용자였다.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나 기독교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유대 풍습은 알고 있었다. 히브리어는 말년에 배우기 시작했으며, 체코어는 현지어로서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카프카의 언어는 독일어였다. 글쓰기는 자신의 일생을 집중한 작업이었지만 현실적인 직업은 보험회사의 법률 고문관이었다. 견문 넓히기와 휴양을 위한 몇 번의 여행, 그리고 말년의 몇 년간의 독립생활을 보낸 베를린을 제외하고는 그는 프라하라는 도시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철저하게 프라하에 귀속되어 있었으면서도 또한 철저하게 뿌리 뽑혀져 있는 그의 浮動적인 실존은 그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창출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가족환경 : 소외감의 원천으로서 아버지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프라하에서 체코출신이며 독일어를 쓰는 유대상인인 아버지 헤르만과 어머니 율리아의 첫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거칠고 정열적인 성격과 실제적이고 경제지향적인 생활태도는 예민하고 연약한 프란츠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인 동시에 극복될 수 없는 혐오와 고통스러운 소외감의 원천이 되었다.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이지적이며 영혼적으로는 다양한 감정을 가진 명망 있는 집안출신이었다. 어머니의 성향을 이어받은 카프카는 어릴 적엔 여동생들과도 나이 차가 커서 거의 자신만을 의지하는 외톨이였으며, 성인이 된 후에야 막내여동생인 오트라와 정신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4. 성장 : 학창시절과 직업 인간관계
그는 1889년부터 1901년까지 牛시장 가에 있는 독일초등학교와 독일고등학교에 다닌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15-16세에 스피노자, 다윈, 헤켈 그리고 니체를 읽었으며 무신론자이며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다. 종교적으로 관심이 없고 해방주의자였던 아버지덕분에 집안에 종교적 분위기나 유대교 교육은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로는 괴테, 클라이스트, 그릴팔쩌 그리고 스티프터 등이었다. 대학교입학자격시험을 치룬 뒤 카프카는 철학도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뮌헨에서 화학을 14일 동안 듣고, 독일문학을 한 학기 등록한 뒤인 1901년부터 1906년까지 프라하의 독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다. 1904/5년 카프카는 「어느 투쟁의 기록」을 대부분 완성했다. 문학작품은 토마스 만, 프로베르, 헵벨, 스티프터, 헤세, 도스예프스키, 톨스토이, 스트린드베르그 그리고 로버르트 발저를 읽었다. 카프카는 평생동안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작가와 작품, 다시 말해서 스티프터의 「늦여름」, 헵벨의 「보물상자」그리고 그림형제의 동화를 사랑했다. 대학시절인 1902년부터 그는 평생친구인 막스 브로트와 사귀게 된다. 시각장애인 오스카 바움 그리고 펠릭스 벨치와도 가깝게 지낸다. 카프카는 이렇게 독일어 문화권에서 교육을 받고 그 정신적 배경을 전수 받았지만 여전히 교류범위는 유대인들이었다. 1906년 6월 법학박사학위를 받고는 프라하 민형사법원에서 일년간 실습을 한 뒤 1907년부터 프라하 근로자상해보험원의 관료로 일하게 되는데, 1917년 발병할 때까지 근무했고 그 뒤 병이 악화될 때에도 몇 번의 휴직이 있었지만 상해예방처에서 일했다. 직업과 문학적 소명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시민적 직업이 요구하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매달렸다. 그는 프라하의 지식인층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과도 접촉했다. 릴케나 베르펠과 같은 작가들과는 달리 카프카는 체코인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체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모임에 자주 나갔는데, 언제나 혼자 갔다. 자신과 친한 프라하의 독일어작가들은 체코인들의 정치생활에 이질감을 느꼈으며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5. 유대문화 : 유대교와 이디시어
1911년부터 그는 유대교의 역사와 이디쉬문학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다. 카프카는는 체코, 독일 그리고 유대인의 삼민족 도시인 프라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만족주의적 충돌 속에서 고향 없는 자의 무기력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토양은 비록 독일문학의 전통에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 문화권으로 유입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적대적인 그들의 언어로 자신의 진실을 담아내야 하는 역설을 인식했던 것이다. 체코인도 독일인도 아닌 더욱이 유대인도 아닌 카프카가 공개적으로 유대주의로의 귀속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은 1911/12년 가을, 겨울에 프라하로 초빙된 이디쉬 연극을 보고나서이다. 이 보잘것없는 동구유대 연극배우는 전통과 단절되고 통합될 수없는 동화로 정체성과 귀속감 상실의 병을 앓고 있는 서구유대인들에게는 유대민족으로서의 귀속감에 대해 조금도 회의가 없는 살아있는 유대전통 그 자체였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이디시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적대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이 연극단은 미미한 한 점으로 유대전통을 지켰던 것이다. 그들의 연극을 보고 노래를 들으며 카프카는 자신과 같은 동족의 귀중한 소속감을 느꼈으며, 가난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 배우들 몸에 배어 나오는 소수민족 존재적 면모가 시온주의자들의 민족주의적 팔레스티나와 대조되게 카프카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연극단과의 만남은 유대교와 이디시어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주었을 뿐더러 카프카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6. 사랑 : 카프카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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