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

 1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1
 2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2
 3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3
 4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4
 5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5
 6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6
 7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7
 8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가람 이병기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가람 이 병 기
Ⅰ. 생애와 활동
시조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가람은 자신의 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람은 강이란 우리 말이니 온갖 샘물이 모이어 가람이 되고 나아가 바다가 된다. 그러니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 근원이 무궁하고 끝도 무궁하여 진실로 떳떳함을 이루니 완전하며 산과 들 사이에 끼여 있어 뭍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함이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람의 작호의 변에서 우리는 가람 스스로가 표상하고 있는 인간적 모습을 그려볼 수 있으며,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떳떳하되 중용의 도를 지켜 조화롭게 살고자 했던 그의 삶의 철학과 만나게 된다.
이병기(1891~1968)는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에서 출생했다. 변호사인 이 채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유교적인 가풍에서 할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아래 8세에서 18세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기에 새롭고 혁신적인 내용을 담은 서적을 접하면서 신학문에 눈을 뜬 가람은 전주공립 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1910년에야 관립 한성 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사범학교 2학년 때 교외에서 열린 조선어 강습원에서 1년간 주시경선생의 국문법과 어문 연구, 그리고 개화기 신문명에 몰두하였다. 1913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남양, 전주 등지의 공립 보통학교 훈도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국어 국문학, 국사학 관계의 문헌을 광범하게 수집하며 시가 문학에 대한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1921년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 일제하의 조직적인 우리말 연구 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1922년부터 시조창작과 연구에 박차를 가한다.
1926년 「시조란 무엇인고」 시조부흥운동: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계급 문학에 대항하여 최남선, 이광수가 중심이 되어 활동한 국민문학운동의 핵심운동이다. 초기에는 3장 6구 고시조의 형식을 넘지 못하였다. 그 뒤 이병기에 의하여 현대시조가 만들어졌고, 이은상은 시조 부흥 가능성을 재확인하여 이후 시조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 운동은 악곡의 창사(唱詞)로서의 시조가 아니라 한국의 언어적 특성과 민족적 리듬이 나타나는 단시로서의 시조가 가지는 중요성과 부활의 타당성을 강조하였고, 연시조나 구별 배행시조 등 새로운 시조를 선보였다.
※ 구별 배행시조: 각 구가 한 행이 되어 6행이 한 수를 이루는 시조를 말한다. 초장, 중장, 종장을 각각 두 구로 나누어6행으로 구성한다. _ _ // _ _ // _ _
, 1928년 「율격과 시조」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며 시조 연구를 중심과제로 한 가요 연구회도 조직한다. 1930년 한글 맞춤법 제정위원이 되고, 1932년 논문「시조는 혁신하자」를 동아일보에 발표한다. 삼남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말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깨우치고 알리는 일에 전념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속자료와 민요를 수집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1938년에는 연희 전문학교 강사가 되어 조선 문학을 강의하게 되고 1939년부터는 동아일보 학예면의 시조난을 담당한다. 1924년 무렵부터 발표되기 시작한 작품들을 골라 1939년 가을에 「가람시조집」을 발간하였다. 이렇듯 시조의 기치를 든 가람은 유일한 민족 문학지인 과 신춘 문예의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동안 신인을 발굴하고 후배를 양성하여 갔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1942년 8월 19일 조선어학회의 사업의 일환으로서 조선어사전 편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실무를 맡고 있던 정태진이 함흥 영생여중학생사건의 증인으로 채택되어 함흥경찰서에 구류를 당하게 되면서 발단된 사건을 말한다. 홍원에서 다니던 영생여자중학교 한 학생이 전진역에서 형사들에게 불신검문을 당하게 되었다. 형사들은 노트속에 끼워져 있는 ‘독립만세’의 글귀를 발견하고 그 학생을 연행하여 조사한 결과 이에 연류된 학생 5,6명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증인으로 불려 간 이가 정태진이었으며, 그에게 조선독립 단체의 일원이라는 구실을 붙여 만들어 낸 사건이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이다.
으로 피검, 1943년 기소 유예로 풀려나온 가람은 낙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틈틈이 우리의 고전문학을 섭렵하면서 동양의 전통적 선비로 돌아간 것이다. 애주가, 애란가(愛蘭家), 애서가(愛書家)이기도 한 가람은 난초를 키우며 자연을 관조하였다. 해방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수관 편수관: 책을 편집하고 수정하는 일을 맡아보는 공무원
으로 취직하여 국어 교과서의 편찬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는 그가 바라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시조나 짓고 책이나 모아 뒤적이고 노트나 만들고 국학에 당한 몇 가지 저작이나 하고 교육 겸 호구나 하기 위하여 칠판에 백묵이나 날리자는 것”이 그의 본분의 사업이었고 소망이었다. 1947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국어 국문학과 교수로 피임된 이후부터 그는 평생을 대학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바친다.
주로 시가 연구에 몰두한 가람이지만 산문문학에 대한 개척자적 공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박철과 공저로 한국문학사를 총정리 한 「국문학전사」를 발간하였고 그 밖에 시조 및 수필도 남겼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에는, 한글날 행사와 함께 「우리말 큰사전」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이 행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갑자기 뇌출혈이 일어났다. 요양 중, 건강이 회복되어 1966년에는 초기 작품을 포함하여 시조 93편과 시조론, 고전연구, 일기 등을 수록한 「가람문선」을 발간했다. 10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1968년 향년 78세로 숨을 거두었다.
Ⅱ. 가람의 시조관과 작시원리
「시조란 무엇인고」(동아일보, 1926)와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28) 그리고「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등의 글에서 가람의 혁신적인 시조론이 잘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김봉군 외(1984),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김용직(2000), 『한국현대시인연구(하)』, 서울대학교출판부.
김제현(1995), 『이병기, 그 난초 같은 삶과 문학』, 건국대학교 출판부.
이선희(1994), 가람 이병기 시조에 나타난 전통성 연구, 청람어문학 1
최승호(1998), 이병기의 시와 선비적 미의식, 한국현대문학연구 제6집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