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사자설 捕蛇者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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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포사자설(捕蛇者說)
1. 유종원(柳宗元) (773 - 819)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시인으로 자는 자후(子厚)이고 창안(長安) 출생하였다.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르며,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유종원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문장을 잘 쓰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순종이 즉위한 뒤 왕숙문 등이 주도하는 정치 개혁에 적극 가담하였다가, 혁신 정치가 실패하여 귀양살이를 하였고 귀양살이 중 47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새 任地(임지)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유종원의 죽음 소식을 들은 한유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묘지명을 지었다. 유종원의 생애를 살펴보는 대목은 이렇게 되어 있다. "유종원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것에 통달해 있었다. 부친의 생존시에는 소년이었지만 이미 완성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과거의 進士試(진사시)에 급제하여 단연 출중하게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見頭角). 사람들은 모두 유씨 가문에 자식다운 자식이 났다고 말했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 반하여, 유종원은 유도불(儒道佛)을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한유와 유종원은 정치적 성향은 서로 달랐으나 문학적으로는 서로 존중하였다. 문학이론 역시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으나 고문운동을 이끄는 데는 한유가 보다 적극적이었다. 한유의 학설이 어떤 면에서는 초기 고문운동가의 이론과 부합되지 않았으나 그는 그의 학설을 이단배척의 무기로 삼았으며, 이를 더욱 더 고취하였다. 유종원도 유가 학설을 표방하였지만 불교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천설(天說)》 《비국어(非國語)》 《봉건론(封建論)》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 우언(寓言) 형식을 취한 풍자문(諷刺文)과 산수(山水)를 묘사한 산문에도 능했다. 그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자신의 우울과 고민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45권) 《외집(外集)》(2권) 《보유(補遺)》(1권) 등이 있다.
2.작품해석
영주지방의 들에 특이한 뱀이 생산되는데, 검은 바탕에 흰 무늬(黑質白章)가 있으며, 풀과 나무에 닿으면 모두 죽고, 사람을 물면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잡아 포를 떠서 약으로 만들면, 중풍(大風)과 마비되는 병과 종기를 가히 그치게 할 수 있으며, 죽은 살을 제거하고, 기생충을 죽이기도 한다. 처음에는 태의(太醫)가 왕명으로, 이것을 모아 한해에 그 두 마리를 세금으로 바치게 하되, 이것을 능히 잡을 수 있는 자는 세금 바치는 것을 면제시키도록 모집을 하니, 영주지방 사람들이 다투어 바삐 분주하였다.
장씨(蔣氏)라는 사람이 그 일을 삼대에 걸쳐 하고 있었다. 내가 물으니, 그는 답하기를,“내 할아버지가 여기에서 죽었고, 내 아버지도 여기에서 죽었으며, 지금 내가 이어서 일을 한지 12년이 되었는데, 거의 죽을 뻔한지가 여러 번 있었다,”고 말을 함에 그 모습이 심히 슬픈 것 같거늘,
내가 슬프게 여겨 또한 말하기를, “그대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여, 내가 장차 이 일을 맡은 자(稅吏)에게 고하여 너의 부역(뱀 잡는 일)을 바꿔주고, 너의 세금을 회복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는가?”하니 장씨는 크게 슬퍼하며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말하기를, “君께서 슬퍼하여 장차 나를 살려주려고 하시지만, 나의 이 역할의 불행함이 내 세금을 회복하는 것보다 불행이 심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이미 병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집안이 이 고을에 삼대에 걸쳐 살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60여 년이 되었습니다. 마을 이웃의 삶이 땅의 소출은 날마다 줄어들고, 그 집의 수입을 다 바쳐도 모자라니, 울부짖으며 이사가기도 하고, 굶주리고 갈증나서 쓰러지기도 하고, 비바람에 닳고 추위와 더위를 당하여 지독한 병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어 가끔씩 죽는 자가 서로 이어집니다. 그 전에 나의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자들은 지금 그 집은 열에 하나도 없고, 나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자들도 지금 그 집이 열에 둘 셋도 없으며, 나와 더불어 12년을 살던 자들도 지금 그 집이 열에 넷, 다섯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는 죽지 않았으면 이사를 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뱀 잡는 것으로 홀로 남아 있습니다. 사나운 관리들이 우리 이웃에 와서 동서로 부딪치고, 남북으로 떠들썩하게 시끄럽게 부르짖어 놀라게 하는 자가 있으니, 비록 닭과 개라도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그 항아리를 보고 나의 뱀이 아직 남아 있으면 느긋하게 눕고, 조심스럽게 먹이를 먹이고, 때를 맞춰 (뱀을) 바치고, 물러나서는 그 땅에 있는 것을 달게 먹으며, 나의 여생(吾齒)를 다하니, 대개 한 해에 죽을 고비가 두 번이요, 그 나머지는 즐겁게 즐기니, 어찌 나의 이웃이 아침마다 이것(관리들의 소동)이 있는 것과 같겠습니까? 지금 비록 여기서 죽더라도 나의 이웃의 죽음과 비교하면 이미 나는 뒤이니(늦게 죽은 것이니), 또한 어찌 지독하게 (고통으로)여기겠습니까?“하였다.
내가 듣고 더욱 슬퍼하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가혹한 정치가 호랑이 보다 무섭다(苛政於猛虎也)하셨는데, 나는 일찍이 이 말을 의심했었는데, 지금 장씨를 살펴보니 더욱 믿을 수 있겠다. 아! 세금을 거두는 지독함이 이 뱀보다 심함이 있음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이야기로 적어서 민정을 관찰하는 자들이 터득하기를 기다리노라.
3.주제 : 가혹한 정치는 뱀보다도 더 무섭다.
가렴주구, 苛政猛於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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