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쑤 성을 다녀와서 남경 무석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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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쑤 성을 다녀와서 남경 무석 소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강소성을 다녀와서
(남경, 무석, 소주)
2010년 겨울방학 때 중국(中國)에서의 첫 여행으로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북경(北京)으로 여행 갔다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 여행으로 강소성(江蘇省)의 남경(南京), 무석(无錫), 소주(蘇州)을 갔다 왔다. 3월말 뜻밖의 여행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끼리 모여 얘기했던 가고 싶었던 여행지가 아니어서 많이 실망을 했었다. 그래서 기대가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북경(北京) 여행가기 전에 느꼈던 여행의 설렘이 느껴지지 않았다.
4월 3일, 앞으로 2박3일간의 여행이 시작이 되었다. 모두 학교(學校) 정문(正門)으로 8시까지 모였다. 학교(學校) 정문(正門) 앞에 우릴 기다리고 있는 19인승 미니버스, 저렇게 작은 버스에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어 앉아 여행갈 생각하니 아찔했다. 한편으론 저 작은 버스로 2박3일 동안 여행을 다닐 수는 있는지 안전하게 우리의 목적지를 갈 수 있을지 의심도 되었다. 드디어 출발, 출발을 하니 이제야 드디어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여행코스는 남경(南京), 무석(无錫), 소주(蘇州)로 제일 먼 남경(南京)부터 간다고 했다. 중국(中國)의 고속도로(高速道路)는 우리나라 고속도로(高速道路) 주변과 달리 땅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산보다는 온통 평지였다. 창밖으로 본 중국(中國)은 고요했다. 단지, 고속도로(高速道路)만 그렇지 않았다. 고속도로(高速道路)를 달리는 중간에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교통사고(交通事故), 한국(韓國)에서 보았던 2중 추돌사고가 아닌 적게는 3중 추돌사고 크게는 5중 추돌사고. 남경(南京) 까지 가는 4시간 동안 추돌사고만 4번이나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교통사고(交通事故)가 많이 나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중국인(中國人)들의 무지막지한 교통(交通)문화(文化)는 몸소 느낀 게 있어 알고는 있었지만 위험한 고속도로(高速道路)에서까지의 교통(交通)문화(文化)는 생각지도 못한 충격 이였다. 한 인터넷 뉴스에서는 중국(中國)에서의 매년 교통사고(交通事故) 사망자수가 최근 몇 년 동안 평균 10만 명을 넘어서 세계(世界)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중국(中國) 오기 전에는 중국(中國) 사람들은 모두 慢慢정신인 줄 알았는데, 중국(中國)에 오자마자 본 교통(交通)문화(文化)를 보고 우리가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중국(中國)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격이 급해 기다리는 거에 짜증내고 화내고 무조건 빨리빨리 하려고 한다.
남경(南京)까지 가는 길은 차로 4시간 넘게 걸렸다. 고속도로(高速道路)에서 차까지 밀려 원래는 4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더 걸렸다. 가는 내내 버스에서 지겨워서 죽을 뻔했다. 한국(韓國)에서 4시간이면 강원도(江原道)에서 인천(仁川) 가는 시간인데 오랜만에 버스타고 가려니깐 힘들었나보다. 중간에 휴게소 한 번 들렸는데, 우리나라의 휴게소 하면 사람 많은 식당(食堂)이 생각난다면 중국(中國)의 휴게소는 우리나라의 반대였다. 휴게소에 화장실(化粧室), 식당(食堂), 슈퍼, 주유소 있을 거 다 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식당(食堂)도 가봤는데 운영도 하고 있지 않아 닫혀 있었다. 화장실(化粧室)만 사람으로 북적였다.
드디어 남경(南京) 도착, 처음으로 간 곳은 중산릉(中山陵) 이였다. 중산릉(中山陵)은 중국(中國) 혁명(革命)의 아버지라 부르는 손문(孫文)이 묻혀 있는 곳으로, 손문(孫文)의 호가 중산(中山)이라고 해서 중산릉(中山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손문(孫文)의 능묘(陵墓)는 ‘남경(南京)을 찾아 중산릉(中山陵)에 들리지 않는다면 중국인(中國人)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중국인(中國人)들이 한번쯤은 반드시 참배하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한다. 손문(孫文)이 얼마나 중국인(中國人)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손문(孫文)이 국민혁명(國民革命)이 한창 일 때 북경(北京)에서 객사(客死)한 뒤 남경(南京)으로 옮겨 매장하였다고 한다. 또 국민(國民)정권(政權)이 대만(臺灣)으로 옮긴 뒤 대만(臺灣)에도 중산릉(中山陵)을 만들었는데 그 곳은 진짜가 아니고, 남경(南京)에 있는 중산릉(中山陵)이 진짜 손문(孫文)의 묘(墓)라고 한다.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신기한건 황제(皇帝)의 무덤에만 붙인다는 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평생을 절대(絶對)왕정(王政)과 싸운 혁명가(革命家)인 손문(孫文)을 황제(皇帝)로 생각한 중국인(中國人)들의 사상(思想)이 아닌가 생각했다. 손문(孫文)이 안치된 제당(祭堂)은 하얀 벽과 푸른색 기와가 인상적인 건물인데 이것은 국민당(國民黨)의 깃발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상징한다고 한다.
중산릉(中山陵)으로 오르는 참배 계단은 392개로 언제 올라가나 걱정이 태산이였지만 이왕 온 거 그래도 보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힘들게 올라갔다. 중산릉(中山陵)을 올라가는 첫 번째 문에 있는 중간 문 위의 횡액(橫厄)에는 손문(孫文)의 친필인 천하위공(天下公)이 새겨져 있었고 첫 번째 문을 지나면 중간에 또 다른 문이 보이는데 그 문 안에는 큰 비석(碑
石)에 국민당(國民黨) 원로인 단연개(延)가 쓴 친필을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나니 아래서 본 제당(祭堂)을 볼 수 있었고 돌아보니 제당(祭堂) 아래로 보이는 경치 또한 매우 예뻤다. 날씨도 좋아 멀리까지 뚜렷이 보여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느꼈다. 중산릉(中山陵) 건물 정면에는 있는 세 아치 위쪽에는 각각 민주(民主), 민생(民生), 민권(民權) 이라는 손문(孫文)의 유명한 삼민주의(三民主義) 구호가 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1905년 무렵 중국(中國)의 현실을 반영한 정치구호라고 한다. 중산릉(中山陵) 앞에는 커다란 반월형의 광장이 있고, 광장에는 손문(孫文)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 앞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 있었다. 제당 안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 줄은 손문(孫文)의 묘실(墓室)로 들어가는 줄로 우리도 경건한 마음으로 줄을 서서 들어갔다. 묘실(墓室) 안으로 들어가니 보이지 않는 손문(孫文)의 위대함을 느꼈다. 묘실(墓室) 위벽에는 국민당(國民黨) 국기가 타일로 만들어 놓았다. 묘실(墓室)에는 손문(孫文)의 와상(渦狀)이 안치되어있었다. 그 안에 손문(孫文)의 유해가 묻혀 있었다. 중산릉(中山陵)을 나오면서 중국(中國)의 뼈아픈 근대사(近代史)와 혁명가(革命家)의 치열한 삶을 잠시 뒤돌아보았고, 중국(中國)과 대만(臺灣) 모두에서 국부(國父)로 존경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산릉(中山陵)을 나와 버스로 달려 도착한 곳은 총통부(府) 이었다. 총통부(府)는 청(靑). 태평천국(太平天國)시기에 궁으로 썼고, 중국(中國) 국민당(國民黨)의 손문(孫文)이나 장개석(蔣介石) 등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왜 중산릉(中山陵) 다음으로 이 곳 총통부(府)로 왔는지 이해가 갔다. 처음에는 여행책자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곳 이여서 중요하지 않은 데 데려 온 줄 알았는데 나의 오해였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을 줄이야 누가 생각했겠는가. 정원(庭園) 같은 길을 따라 들어가는데 오른쪽에는 정계인(政界人)들 같이 보이는 사람들 여럿의 사진이 쭉 세워져 있었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니 중산릉(中山陵)에서 보았던 천하위공(天下公)이라는 글씨를 또 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집무실 같은 방들이 있었고 그 안에는 그 당시에 썼던 책상이나 물건들을 그대로 재연해 놓았고 그 시대에 있었던 일들을 적어 놓은 안내판들이 박물관(博物館)처럼 전시해 두었다. 둘러보면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회의(會意)를 하며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린 이 곳에서 중국(中國)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촬영도 했다. 내가 마치 진짜 옛날 중국(中國) 황실(皇室) 사람이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코스는 부자묘(夫子廟) 였다. 부자묘(夫子廟)는 남경(南京) 시에서 가장 큰 공자(孔子) 사당(祠堂)으로 공자(孔子)에 대한 신격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034년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자묘(夫子廟) 자체보다는 주변거리가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부자묘(夫子廟)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자유시간이 1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아서 부자묘(夫子廟) 거리만 보고 왔다. 부자묘(夫子廟) 거리는 유명한 만큼 역시나 도착해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거리에 있는 크고 화려한 쇼핑단지와 중국(中國) 기념품이 될 만한 소품, 옷, 장난감, 음식 등등 볼거리가 많이 있었다. 부자묘(夫子廟) 거리는 남경(南京)에서 가장 운치 있는 거리로 모든 건물이 강남(江南)의 전통(傳統)가옥(家屋)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그대로의 번화가를 느낄 수 있었고 송(宋)나라 시대의 고대건축 미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의자도 많아 휴식공간으로도 활용하는 거 같아 보기 좋았다. 더 쭉 들어가다 보면 진회화(秦淮河) 라는 작은 강이 나오는데, 진회화(秦淮河) 맞은편 벽면에는 화려한 용 조각이 우리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강에서는 유람선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밤에는 야시장도 들어선다는데, 보지 못 한 게 아쉽기만 했다. 우린 부자묘(夫子廟) 거리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오늘 하루를 마치며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에서 우리가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체크인이 늦어진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지만 다행이 호텔에 묵을 수는 있었다. 어디 가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그저 웃음 만 나왔다.
이제 여행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식사는 호텔의 식당(食堂)에서 먹었다. 어제 다니면서 먹으러 들어갔던 식당(食堂) 보다는 먹을 것이 많아 좋았다. 식당(食堂) 음식은 주방장 입맛이 이상한건지 이곳 지역 음식은 가흥(嘉興) 음식과는 다르게 짜서 먹기 힘들었고 해산물(海産物)이 풍부한 지역이라 싫어하는 생선 요리가 자꾸 나와서 힘들었다. 아침을 먹고 남경(南京)에서 무석(无錫)로 출발하였다. 무석(无錫)까지 가는 데는 2시간이면 된다고 했는데 역시나 차가 밀려 3시간을 달려 도착했다.
무석(无錫)은 중국(中國)에서 세 번째로 큰 담수호인 태호(太湖)변에 있는 관광도시(觀光都市)로 3000년의 역사(歷史)를 자랑하고 있고, 원래 무석(无錫)은 중국(中國) 제일의 주석(朱錫) 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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