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마음에는 양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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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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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그 때나 지금이나 윤리에 관하여 학문적 소양이 부족한 나의 무지함을 자책하며, 이번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칸트에 관한 몇 권의 책을 꼼꼼히 읽었다. 그러면서 8년 전,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이 명언을 다시 발견 할 수 있었다. 바로 인간의 도덕성, 양심을 강조하기 위해 칸트가 남긴 말이었다. ‘ 내 사춘기에 영향을 미쳤던, 이 멋진 말을 남긴 사람은 약 250년 전,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호기심이 한층 더 부풀어 오름을 느끼며, 점차 칸트의 윤리학과 형식주의에 가까워졌다.
칸트의 윤리학을 부르는 이름은 참으로 많다. 형식주의, 의무주의, 법칙주의, 동기주의, 이성주의, 엄숙주의, 심정주의, 선험주의 등등. 윤리(도덕과 포함)시간에 한번쯤 들어보았던 말들이다. 이 모든 명칭들은 칸트 윤리학의 중요한 측면들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칸트 윤리학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 윤리학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 즉 동기’와 이를 어떤 학문적 전략의 측면에서 이를 보여주고자 했는지에 대해 파악하여야 한다.
그 동기를 고려한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칸트 윤리학은 책임의 윤리학이다. 칸트가 실천 철학의 영역에서 근거 마련에 부심했던 도덕적 현상은 바로 책임이었으며, 이와 함께 정당화하고자 한 명제는 인간만이 존엄성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존엄성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며, 도덕적으로 행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방식으로 행위 한다는 것이고, 책임지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이 자유야 말로 책임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 개념이라는 것이 바로 그의 이론이었다.
이 책임의 윤리학을 고찰하기 위하여 채택된 학문적 전략은 선험적 형식주의이다. 선험성과 형식성에 대한 칸트의 애착은 윤리학 체계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론철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철학체계에서 발견되고 있는 핵심 개념이다. 왜 칸트는 선험성이나 형식성을 그토록 중시했는가. 칸트는 학문의 안전한 길에 들어선 형이상학을 건설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 과제로 생각했다. 칸트가 제시하고 있는 학으로서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두 가지 이성의 사실에 기초해 있다. 바로 과학적으로 확증된 이론적 인식(인식적 경험)이 있다는 ‘순수 이론이성의 사실’과 도덕적 경험이 있다는 ‘실천이성의 사실’이다. 순수 이론이성에 기초하여 선험적 형이상학(자연의 형이상학)을 건설하고 실천이성의 사실에 기초하여 실천적 형이상학을 건설한다. 이 두 가지 형이상학은 상호 유기적으로 보완하고 있으며, 그 양자가 결합함으로써만 진정으로 하나의 온전한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된다는 것이 바로 칸트의 생각이다. 칸트는 기존의 방식과 반대로 윤리학을 통해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도입한 학문적 전략이 바로 선험적 형식주의였던 것이다.
인식의 문제를 다룰 때 칸트는 형식과 실질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내용적인 부분과 형식적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모든 인식적 주장에 공통적인 형식은 선천적이고, 내용적인 것은 항상 후천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내용보다 철저하게 인식의 형식 탐구에 매진하여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칸트의 인식론은 이런 점에서 선험적 형식주의 인식론으로 규정된다.
많은 사람들이 칸트윤리학에서 선의지의 개념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칸트를 윤리적 직관주의자로 간주해 버린다. 칸트가 선의지니 근본악이니 하는 개념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인간이라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만약 칸트가 윤리적 직관주의자라면 왜 그토록 복잡한 절차를 거쳐 도덕법칙을 확립하려 했겠는가? 게다가 칸트는 윤리적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선이 무엇인지를 먼저 밝히고, 그 다음에 앞에서처럼 해명된 선의 내용으로부터 행위 규범을 도출해내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였다.
또한, 칸트는 가능적 무제약자, 즉 가능적으로만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 현실적으로 자유로운 자아(무제약자와 동일한 의미)에 이르는 길로 자유를 제시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자유란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이므로 도덕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곧 자유인이 되는 길이다. 즉, 칸트적 의미의 자유인이란 도덕법칙의 실천적 필연성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칸트에 관하여 공부하면서, 강의시간에 들었던 정언명법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왼손을 사용하여 문을 열어라’라는 규칙은 얼마든지 보편화 가능하지만, 이것은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 이를 통해, 보편화 가능성은 어떤 행위준칙이 도덕법칙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칸트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비판은 칸트가 도덕법칙의 필요충분조건을 논리적 보편화가능성으로 보고 있음을 전제한다. 칸트가 논리적 보편화 가능성을 도덕법칙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간주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보편화 가능성만으로는 어떤 행위준칙이 도덕법칙이 될 수 없다. 위에서 제시한 ‘모든 사람은 왼손을 사용하여 문을 열어라’라는 예는 원래 도덕과 무관한 영역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준칙이 도덕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1.논리적으로 보편화 가능해야하고, 2.자의적이어서는 안 되고, 3.인간성을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4.넷째로 행위자의 자율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만족 시켜야 한다.
한편, 칸트의 윤리학은 도덕성과 적법성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우리의 행위가 도덕법에 대한 순순한 의무의식에서 행해질 때, 그 행위는 도덕성을 가진다. 하지만, 비록 행위가 결과적으로 도덕법에 합치하였다 하더라도, 행위가 도덕법에 대한 순순한 의무의식 이외의 다른 것, 즉 명예심이나 타인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과 같은 경향성에서 행해질 때, 그 행위는 단지 적법성을 가질 뿐인 것이다.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실러의 칸트 해석처럼, 인간이 행위를 할 때는 도덕법에 대한 존경심 이외의 어떤 감정도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동기는 대체로 복합적이다.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의 행위의 도덕성에 말할 수 있으려면, 그런 복합적인 동기 중에 적어도 ‘도덕법에 대한 의식’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존경’이라는 개념이었다. 칸트는 우리의 행위가 감정을 수단으로 해서 행해진다면 참된 도덕성을 가지지 못함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것을 이성이 아니고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왜 칸트는 이런 일반적인 생각에 거스르는 주장을 했을까? 정답은 형식주의 때문이다. 칸트는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오로지 선천적인 것, 형식적인 것만을 다루면서 윤리학에서 감정을 배격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그 결과 행위의 동기를 설명함에 있어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의 감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것이 참된, 선적천인 이성에서 유래한 동기라고 주장한다. 이는 연구가들에게 많은 혼란을 일으키지만, 칸트가 말한 이 도덕법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은 이성과 감성의 종합으로서의 가능적 무한자인 인간이 무한(절대적 무제약자)에 도달하려는 선천적 열망을 도덕철학적으로 표현한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강의수업과 몇 권의 책을 통하여 칸트 철학을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철학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탐구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행해서는 안 되는 것, 합당하게 희망해도 좋은 것과 희망할 수 없는 것을 분간하는 작업을 강조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상태에서 칸트에 대하여 글을 적는 것이 부끄럽다. 강의 내용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많은 관련 서적을 섭렵해야겠다는 다짐도 생겼다. 나 개인의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으로서, 미래를 이끌어 나갈 아동을 가르칠 교사로서, 이러한 윤리학적 지식과 면모를 꾸준히 배우고 익혀나가는 자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