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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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갈량의 출사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시대배경
1.1 삼국지
실제 역사책인 는 진수(陳壽, 233-297)가 진시대에 쓴 정사인데, 배송지(裵松之)가 이에 주를 덧붙이고 이것이 송나라, 원나라를 거치면서 연희(演戱)로 탈바꿈하면서 평민들의 앞에 선 후에 이를 문자로 정착시킨 가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의 탄생인 것이다.
의 저자인 진수는 촉나라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가 마속의 부하로 마속의 참수때에 연좌되었다. 게다가 진수 자신도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으로부터 경시되곤 했다. 진수는 제갈첨보다 일곱 살 아래로, 진수 부자와 제갈량 부자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수가 서른살 되던 해, 촉나라가 망하자 진수는 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그는 역사서인 를 지었다. 이 책은 위, 촉, 오 세나라 중 위나라를 정통왕조로 규정하고, 진씨와 제갈씨의 갈등이 있었던 탓에 제갈량에 대해서 가벼운 평가를 내려서 평판이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많은 사료의 수집과 엄밀한 검증을 통해서 취사선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서술 역시 신용할 만해서 , 에 버금가는 중국 역사서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의 전 65권이며, 그 절반에 가까운 30권이 위지인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위지 30권, 촉지 15권, 오지 20권) 기술 역시 위지만이 황제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위지에는 따로 본기(제기)가 붙어 있으나 촉지와 오지의 경우는 유비, 손권 모두 열전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이 역시 위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저자 진수는 위가 아닌 촉나라 출신이다.
후세 사가들은 촉나라 출신인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촉에 비중을 두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삼국지연의란?
중국 원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 중국 4대기서의 하나로,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라 하며, 또한 삼국의 정사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에서 《삼국지평화》라고도 부른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최고본은 1494년의 서문이 있는 홍치본으로, 이 책도 실은 1522년에 간행한 것이다. 24권 240절로 나누어 기술하였으며 이것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분권을 없애고, 2절을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었다. 청나라 때는 모종강의 개정본이 나와, 이것이 다른 책을 압도하고 정본이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전·후반으로 나누어지며, 전반에서는 유비·관우·장비 3인의 결의형제를 중심으로 나중에 제갈 공명이 가담하게 되는데, 절정은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조조의 대군을 화공으로 무찌르는 적벽의 대전이며, 이것이 위·오·촉의 3국이 분립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후반에서는 관우·유비·장비가 연이어 죽은 다음 제갈 공명의 독무대가 되고, 공명이 6차에 걸친 북정에서 병사하는 의 1절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소설의 주요인물은 유비 등 3인과 공명이지만, 조조의 성격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가장 생기가 넘치는 것은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이며, 특히 장비의 순진하고 솔직한 성격은 중국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 신문학 이전에는 한문으로 된 원본이 수입되어 읽혔으나 그 후 수많은 국역본이 나와 널리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게 되었다.
1.2 삼국지 역사적 배경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 오(吳), 촉(蜀) 3국이 정립했던 시대이며, 중국 역사에서 가장 복잡했던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뤄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둥(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食客)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현신(賢臣)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해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吳)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揚子江]의 중 ·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위국(魏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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