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의 어거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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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의 어거스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히포의 어거스틴
시빌의 이시도르(c.560-636)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경구가 시빌의 도서관에 어거스틴의 저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책장 위에 적혀 있다.
Mentitur, qui te totum legisse fatetur,
An quis cuncta tua lector habere potest?
성서를 제외하고는 히포의 어거스틴 만큼 서구 기독교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그 어떤 작가도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결코 제한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향은 특히 12세기의 신학적 르네상스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관련되어 있다. 칸더베리의 안셀름은 그가 정교를 국교와 동일시 할 때 "catholicrum patrum et maxime beati Augustim"의 저술에서 서구 신학적 전통을 변호했다. 더도 덜도 없이 모든 중세 신학은 ‘Augustinian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은총의 교리에 대한 문헌들에 많은 주의가 기울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교리를 다루는 연구에 있어 실질적인 부재가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어거스틴의 사회적정치적 사상에서 그의 의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이 고려되어 질 때 이 공백은 더욱 놀랄만한 것이다. 현재 연구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의 교리의 중요성은 중세시대와 그 이후에 그것의 영향과 관계된다. 어거스틴의 의 교리는 서구 신학 전통의 여명기에 출현할 가장 의미있는 문제에 대한 첫 번째 논쟁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의에 대한 미래의 논쟁을 발생시킬 가능성을 가진 구조를 세웠다.
어거스틴의 의 교리가 중요한 발전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로 395년의 히포의 레기스대회에서 승진전에 어거스틴은 후에 자기가 비난할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어 마실리안주의의 ‘initium fidei 의 속성과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주교 서품을 받고난 30년 뒤 어거스틴은 그의 초기 작품, 특별히 “Expositio quarundam propositionum ex epistula ad Romanos(394)"은 은총의 교리와 관련된 그의 후기 관점의 빛 아래서 교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언제 어거스틴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꾸었는가? 운좋게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 대답은 396년 말이나 397년 초에 “Simplicianus"에게 쓴 두 권의 책 중에서 첫 번째 책 안에 있었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관점의 변화에 대한 열쇠(key)를 포함한 것으로 간주된다. 펠라기우스 논쟁이 다음세기 초에 비로소 발생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어거스틴이 전혀 논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향후 ‘Augustinian라는 통칭을 산출할 그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거스틴의 의 교리가 단지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396년 전에 어거스틴은 아마도 완덕을 향한 상승으로써 영성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크리스쳔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그 자신안에 있는 신념과 그를 구원할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향한 영적 상승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의 초기 신념에 특히 잘 표현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밀라노에 잘 아는 심플리키아누스가 예정에 관련되는 연속된 질문들을 제출했던 395년에 이 미숙한 견해를 재검토해야만 했다. ‘왜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했는가?’ 라는 이러한 주제를 이 때까지는 어거스틴이 피해왔지만 이제는 이 질문에 대해 고려해야만 했고 그 결과로 그는 의지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지지하는 초기의 시도를 버려야만 했던 것 같다. 로마서 9:10-29의 숙고의 결과로서 의에 대한 그의 생각의 중요한 변화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언급 되어 질 수 있다.
1. 인간의 선택은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포에 기초하여 이제는 이해된다. 어거스틴은 일찍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전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간적인 선택이 있다라고 가르쳤다.
2. 하나님의 은총의 제공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응답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해되어 진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오로지 그의 독립적인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는 그의 초기 가르침을 포기한다.
3.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인정했던 반면에 지금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에 의해 손상되고, 은총에 의해 먼저 자유함을 받지 않는한 인간의 의를 이끌어 낼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의에 대한 가르침이 이 시점에서 급진적으로 변화되었고, 그가 약30년 동안 동일한 기본적 개념의 틀을 가지고 활동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의 관점에서, 이후에 ‘고전적 어거스틴의 은총 신학’으로써 알려 질 그의 성숙한 의교리에 대한 우리의 분석으로부터 그가 주교로 승진하기 이전에 쓴 어떤 작품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우리는 신학적 분석의 가장 어려운 국면들 중의 하나를(어거스틴의 ‘liberum arbitrium에 대한 가르침) 고려함으로 이 신학의 분석을 시작한다.
루터의 1525년 논문 ‘de servo arbitrio는 에클라눔의 펠리기안 주의자인 줄리안 주교와의 논쟁의 과정에서 어거스틴의 의해 승인되어 사용되어진 구절로부터 논문의 제목이 유래한다. 이 구문의 선택에 있어서 루터는 ‘servum arbitrium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교리를 위해서 어거스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가 그와 같은 교리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운명론자인 반대자들에 대항에 카톨릭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서 한동안 반마니교 논쟁에 종사했었다.
’De libero arbitrio(388-95)는 확실히 그러한 숙명론적 가르침에 대항하여 쓰여졌다. (예:악은 본래적이고 인간의 자유의지의 작품은 아니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liberum arbitrim의 본성에 대한 그의 초기 관점을 후에 수정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liberum arbitrim에 존재의 중심명제는 제거 되거나 급진적으로 교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점에서 펠라기우스주의는 마니교주의에 대한 반명제로써 간주될 수도 있다. 후자는 자유의지의 존재를 제거했음에 반하여 전자는 칭의 안에 있는 그것의 역할을 과장해서 말했다. 어거스틴의 첫 반펠라기우스적인 저술인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411) 는 펠라기우스주의가 인간의 ‘liberm arbitrium(자유의지)’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부여했고, 그것 때문에 실질적으로 특별한 은총을 위한 필요를 제거했다는 주장을 가지고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liberm arbitrium(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 그 오류를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이 강조되어져야만 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liberm arbitrium(자유의지)’의 부정 없이도 은총의 필요성은 변호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칭의 안에서의 인간 자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은총과 자유의지 둘 다 강조될 수 있다는 가정을 이어나간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정확한 관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자유의지 없이 인간이 선하다 악하다라고 말해 질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판단되어 지는 것은 그의 이 ‘liberm arbitrium(자유의지)’의 사용에 기초한다. 은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코 폐지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세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