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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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군신화 분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단군신화〉의 생성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밝(ㅏ는 아래아)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종족적 관계는 여하튼 간에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고 본다.
둘째, 이 신화가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신화 또는 토테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사실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단군신화〉의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재배민족의 제의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다섯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논거로 고아시아족의 시조설화에 곰숭배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 최고의 샤먼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이 어원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 텡그리의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고대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 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쥬신이라는 말이 나중에 어원 변천되어서 조선이라는 말이 되었다. 물론 쥬신보다 오래된 구리조선이라는 말이 있었지만......하여튼 쥬신족에 대해 설명하겠다. 쥬신족은 만주 대륙에 넓게 퍼져 자리를 잡았는데, 송화강 일대로부터 압록강, 요하, 황하까지 항상 강과 물을 끼고 그 주변에 나라를 세웠다. 강변에는 각 씨족 집단들이 살았고, 그들이 사는 곳엔 나루가 있었다. (나루는 후에 차츰 그 의미가 변하여 라루-->라라-->나라로 발음이 변하면서 국가를 뜻하게 됨) 설명이 길어진다. 애고 쥬신족은 북방기마민족이었다.이동이 빠르고 쉬워서 발해 연안과 황해안을 선점하여 중화족을 내륙쪽에 묶어 봉쇄함으로 수두(신단)를 중심으로 대단군의 명령이 있으면 전민족의 총출동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쥬신족은 물을 끼고 생활하고 추위와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한 지식과 지혜가 발달하였다. 발해 연안을 중심으로 서기전 6000년 경에는 벌써 정착집단 문화를 발달시키더니 서기전 4500년경에 드디어 인류최초의 홍산 문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 중국의 산둥반도, 허베이성 일대로 진출하여 황화 문명을 일으키니. 전 만주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를 포함하여 중국의 동부는 다 쥬신의 활동 무대였고, 본래의 우리 영토였다.
환국의 역사에 대해서 말을 해보겠다 환국桓國이란 환인이 다스린 나라를 가리키는데, 삼국유사 첫머리도 환인으로 시작하고 있으므로 우리 역사의 시발점은 단군이 아니라 바로 환국과 환인이다. 그러나 단군조선과 관련된 사료에 비해 환인과 환웅에 대한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대략적인 내용밖에 소개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먼저 삼성기 하편의 내용부터 보자.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만난 곳을 아이사타라 한다.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구환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세계의 수많은 민족의 시조가 대부분 신격화되어 있고 그들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신화화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화 속에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렇게 역사를 신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철학적 사고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 고조선 편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환인이 통치하던 환국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데 비해, 삼성기는 환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까지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서 인류의 시조를 나반과 아만이라고 했는데, 나반은 우리말 하나반 하나버지 할아버지와 관계있는 어원이며, 아만은 어미 어마니 어머니와 관계되는 어원으로 볼 수 있다. 또 나반과 아만이 처음 만나서 혼례를 이룬 장소를 아이사타라고 했는데, 이 지명은 후에 단군 왕검이 도읍으로 정했다는 아사달과 관계가 있다. 즉 아이사타(아리사타)에서 아사달로 전음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사달에서 아사는 아침 처음 첫 새로운 광명 동녘 동방 태양 등을 의미하는 고대의 우리말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아침을 아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고대 우리말이 그대로 옮겨간 것이다. 아사달에서 달은 땅 벌판 대지 산등을 의미하는 말로, 현재까지 음지를 응달, 양지를 양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아사달의 원래 어원인 아이사타의 잔영은 지금도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 남아 있는데, 예를 들면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 파키스탄Pakistan,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등의 국명에는 -이스탄istan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이 역시 아이사타isata에서 비롯된 것이며, 터키의 이스탄불이 해뜨는 동방을 의미하는 말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설명은 더욱 신빙성을 얻는다. 산을 몽고어로 타우tau라고 하는데, 이 역시 달達과 같은 뜻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사타에서 아사달로 전음되었다가 다시 알단 아덴 아르덴 아나톨리아 등으로 변천되어 아시아와 유럽 곳곳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삼성기 상편의 기록을 보자. 우리 환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한 신이 사백력(시베리아)의 하늘에 있어 홀로 화하여 신이 되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는 만물을 낳았다. 어느 날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흑룡강, 바이칼 호수)와 백산(천산산맥, 알타이산맥)의 땅에 내려왔다. 이를 환국이라 하고 그를 천제 환인이라 했으며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환인을 가리켜 제석이라 하여 하늘님과 같은 의미라고 해석했는데, 삼성기 본문에도 같은 의미인 천제 환인이라 하여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또한 환국을 다스리는 환인도 한 명이 아니라 역시 7대에까지 전해졌으며 그 시조를 안파견이라고 호칭했음을 말하고 있는데, 안파견이란 곧 아버지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고조선에서 말이나 어미로 알아본 신화다 새로운 점을 알 수 있었다.
고려본기에서 나오는 고구려 건국신화다
『고려본기』에 전해져오는 고구려 건국에 얽힌 이야기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제는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부여 해부루왕의 뒤를 이어 금와왕이 즉위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를 지나다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미인을 만난 왕은 호기심이 일어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 여인의 몸으로 어찌 이런 곳에 있는가 ? " 왕의 물음에 그 묘령의 여인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 저는 본시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라고 합니다. 어느 날 동생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한 남자를 만났지요. 그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꾀었습니다. 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웅신산 밑 압록강가의 외딴 집으로 따라가 정을 통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로 떠나더니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어요. 부모님은 낯선 사내를 따라가 함부로 몸을 맡겼으니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느냐며 노발대발하셨죠. 그래서 결국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된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