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제주인재 일제 주인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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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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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재일 제주인
1. 재일 제주인 현황
2001년 말 일본의 외국인 등록 통계에 따르면, 재일 한인(韓人)의 총수는 63만 2,450명이고, 그 중 재일 제주인은 10만 7,666명으로 전체의 17.2%를 차지하며, 이들은 대부분 도쿄나 오사카 등의 대도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일본에 건너 간지는 100년 정도 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견디다 못해, 혹은 4.3과 전쟁을 피해 그리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요인으로 형성된 재일 제주인은 한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높으며, 친목단체 등과 같은 비공식 조직이 잘 형성되고, 지연, 학연, 혈연적인 네트워크가 강하게 지속되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고광명진관훈, 2004).
이처럼 한 지역사회의 인구 중 20% 규모가 외국에 살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고, 그 이유와 그 곳에서의 사람살이, 더불어 사회문화적인 변동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의 척박한 자연환경은 인간의 생존에 고난과 역경이었기에, 제주인들은 기회가 되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중앙의 입장에서는 변방의 영토를 지켜야 하는 국방상의 이유로 사람들을 섬 밖으로 못나가게 해야 했기에, 출륙금지령이 200년 간이나 내려졌었다. 이후, 구한말을 거쳐 일제시기에 제주인들은 육지 뿐 만 아니라, 일본에 까지 건너가게 된다. 특히 육지보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살기 힘든 땅이라면, 더 좋은 땅으로 가는 것이 이치이므로, 육지와는 달리 일본에는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일제시기뿐 만 아니라, 한국전쟁이후에도 일본으로 사람들은 많이 갔고, 그러한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일본의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산업화 초기에 대량으로 필요한 노동력은 저숙련저임금도 괜찮기 때문에, 농업사회에 살던 사람들은 매우 쉽게 도시로, 공장지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일제시기에는 일본으로 직항하는 연락선이 있어 합법적인 이주였고, 해방이후에는 부산을 거쳐가는 밀항선을 타는 불법으로 바뀌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재일 제주인이 단지 자그마한 숫자가 아니라, 일본사회 내의 또 다른 지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이주민의 적응에 대한 것으로, 초기 이주자들이 그 다음에 건너오는 사람들의 삶을 많이 챙겨준 측면이 강했다. 즉, 그들의 이주를 도왔고, 이주 후의 일자리를 알선해주었으며, 안정된 삶을 찾기까지 보살펴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재일 제주인 뿐 만 아니라, 모든 이주민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다. 이는 그들만의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이주민들은 선주민들에 비해 정치적사회적 차별을 공식비공식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특히 재일 제주인은 일본인들 뿐 만 아니라, 한인교포들에게까지도 이중적인 차별을 받았다.
이렇게 구성된 재일 제주인 사회는 제주에서의 의례생활을 이어나갔다. 대표적으로 제주어를 구사하였으며, 4대 봉사 등 의례생활을 제주에서처럼 진행했다. 제주의 벌초 시기 또는 제사를 지내러 일본에서 오는 교포들이 많은 이유도 이러한 부분이 현지에서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재일 제주인과 도민
재일 교포들은 제주지역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학교 및 마을회관 건립, 전기 가설 등 고향의 각종 개발사업에 많은 금전을 지원하였다. 또한 60년대 들어 시작된 감귤나무 보내기는 제주사회 부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나의 어린시절, 같은 반 친구 중에 한 명은 일본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이 보낸 각종 물건들을 우리에게 자랑한곤 했다. 연필과 연필깎이, 그리고 필통 등의 학용품과 보온도시락은 매우 신기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실에 하나 놓여있던 ‘피아노’가 있었는데, 기증자 이름이 ‘강충남’이었다. 당시 우리학교에 기증된 품목중에는 ‘냉온정수기’도 있었는데, 이것은 중동에 노동자로 일하러 갔던 친구의 아버지가 기증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회관 옆에 있는 비석거리에는 마을을 위한 기부자의 비문이 있었다. 이주민들의 고향에 대한 지원은 이처럼 어린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다. 여기서는 우리 동네 출신의 ‘일본 하루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지난 2006년, 강충남 일본 관서도민협회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83세. 고인은 표선면 세화리 출신으로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전선(富士電線) 그룹을 창업했다. 고인은 1984년 제주도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제13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개최될 당시에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교민사회에서 적극적인 모금운동을 펼쳐 8억3000만원이라는 거금을 기탁 했다. 이와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많은 모금활동을 벌이고 재정을 지원했는데 이러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1986년), 체육훈장 거상장(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1990년)을 수여받았으며 수 차례의 감사장을 받았다. 고인은 고향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벌였는데 사재를 털어 전기시설과 수도시설 비용, 도로포장 비용 등을 지원하는 한편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제주대학교 발전기금으로 10억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또 고인은 일본에 있는 4군데의 제주도 교민단체를 하나로 통합해 관서 제주도민회를 결성함으로써 재일 제주도민들의 단합과 협동에도 기여했다. 고향 발전과 재일 제주도민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한 공로로 1996년 제주도 문화상을 올해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으로부터 자랑스런 해외동포상 대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한국인 기업가로서는 처음으로 1981년 일본의 사업 대상인 통산대신상을 받았으며 후지전선 회사 제품은 일본시장에서 점유율을 40%나 기록하는 등 도내외에서 사회봉사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인은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제주일보 이사를 역임했다.(제주일보, 2006년 8월 19일자)
제주대학교에 수억을 기증한 관계로, 제주대는 본관 앞에 이분의 흉상을 설치했으며, 제막식날 동네에 버스 1대를 보내어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였고, 거기에는 우리 어머니도 포함되었다.
3. 재일 제주인에 대한 도민의 자세
재일 제주인의 12세가 점차 고령화됨에 따라, 재일 제주인으로서 정체성 지속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만은 못하다. 그러나 도민들은 이들의 도움을 통해 지역발전을 이루었으나, 제대로 된 조명은 받지 못한 듯 하다. 단순히 거금의 쾌척자로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만은 아닐까?
참고문헌
※ 참고문헌
고광명진관훈, 2004, “재일 제주인의 상공업 활동에 관한 연구”, 『제주도연구』, 제26집, 제주학회.
고선휘, 2006, 『재일 제주도 사람의 타향살이 : 간토지방을 중심으로』, 북제주문화원.
신행철a, 2004, “재일 제주교포 : 그 소수집단으로서의 성격과 계층구조”, 『제주사회와 제주인』, 제주대학교 출판부.
신행철b, 2004, “제주인의 정체성과 일본 속의 제주인의 삶”, 『제주사회와 제주인』, 제주대학교 출판부.
이문웅, 1988, “재일제주인의 의례생활과 사회조직”, 『제주도연구』, 제5집, 제주도연구회
이문웅, 1989, “재일 제주인 사회에서의 무속”, 『제주도연구』, 제6집, 제주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