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낭만주의 발생 의사회 적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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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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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낭만주의(romanticism)
1. 낭만주의의 이해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이어서 서구에 나타난 문예사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품고 있는 뜻이 무엇이며 그 특질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가리키는 문학적 현상과 개념의 역사를 알아보는 것이 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접근하자마자 우리는 곧 미궁에 빠져든 느낌을 갖게 된다. 문학사가들이 낭만주의 포괄하는 문학적 현상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개념의 역사도 혼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낭만주의시대는 어떤 문학사가에 의하면 1798년에서 1832년까지 비교적 짧은 연대를 포괄하고 있음에 반해서 다른 사가에 의하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체를 포함하는 문학적 현상이다. 이러한 양상은 각국의 문학사로 시선을 옮겨보면 더욱 자심해진다. 독일의 경우 18세기 중후반의 질풍노도운동이 초기 낭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것인데 비하여 영국의 전기 낭만주의는 1800년 여름의 문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워드 휴고는 18세기 후반에서 1800년 무렵까지를 전기 낭만주의로 보고 1830년에서 1840년대의 빅토리아조 시인들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시인들을 후기낭만주의로 분류한다. 이에 비해서 릴리안 퍼스트는 낭만주의의 전사와 낭만주의 운동으로 구분하여 1800년 무렵에 본격적으로 낭만주의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개념의 역사에서도 이 같은 혼란은 마찬가지이다. ‘romantic이란 말이 옛 ’romance에서 유래한 말로서 “기사도, 모험 및 애정의 이야기들과 관계되어 있었으며 허황한 감정, 비개연성, 과장 및 비현실성과 같은 것, 즉 건전하고 합리적인 인생관과 정반대되는 요소들로 특징 지여져 있었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그것은 독일의 아구그스트 빌헬름 슐레겔이 ‘고대적인 것이나 고전적인 것과 대조되는 현대 예술의 특유한 정신’을 나타내는 말로 낭만주의를 정의했을 때도 일정하게 그 의미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까지 지속된 문학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된 데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최초로 낭만적이라는 말을 문학사에서 쓰기 시작한 아폴리트 텐느는 낭만주의 작가들이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해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 이후 ‘낭만주의’가 비평가나 실증주의적 문예학자들에 의해서 문예사조로 분류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관련이나 정치적 관련을 잃고 순수하게 문학적 문제에만 치중했던 유파로 묘사되게 된다. 낭만주의 또는 낭만적이란 말이 내포하는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그것들이 단일한 의미, 즉 공통된 특성을 지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르네월렉은 낭만주의가 시에 있어서는 상상력을 중시하고 세계관에 있어서는 자연중시의 사상, 시의 스타일에 있어서는 상징과 신화를 중시하는 통일된 문학운동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에 비해 아더 러브조이는 낭만주의가 모순되고 차이 지어지는 경향들을 포괄하고 있어서 통일성을 찾기 어려운 문학현상이라고 보았다. 실제 문학현상의 전개를 살피면 러브조이의 견해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되지만 그 다양하고 모순되는 현상들을 포괄하는 개념을 획득하는 데는 일정한 공통성을 추출하는 작업을 포기할 수도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아놀드 하우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주위사람들과 이질감을 느끼는 개인의 자기표현으로 성립한 문학으로서 인간의 의식이 급변한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이었던 것이다. ‘근대의 모든 예술은 낭만적 자유운동의 결과이다’는 견해는 모든 권위에 대한 자유의 투쟁이자 산업화, 도시화와 같은 사회적 압박, 질곡으로부터의 해방투쟁이었던 역사적 낭만주의에 대한 통일적 인식의 필요성을 제고하고 있다. 여기서 낭만주의를 상상력과 시를 통해서 역사현실로부터 도피하려했던 순수문예운동적인 측면보다도 산업화와 혁명의 좌절 속에서도 시를 우월적 실재인 가치로 인식하여 옹호했던 사조라는 측면에서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변동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2. 낭만주의 발생의 사회적 조건
낭만주의가 어떤 원인에서 어떻게 발생되었는지를 간단하게 말하는 방법은 그 어는 것이나 타당하지 않다. 중세로부터 시작된 생산의 합리화와 생활의 계획화, 도시적 삶의 형태들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좀 더 체계화되고 지배적인 것으로 되면서 그것이 사회의 여러 부면에 영향을 끼치는 속에 낭만주의의 태동의 원인이 조성되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한 가지 원인이나 몇 가지 특화 할 수 있는 원인만을 열거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근대적인 삶의 특질들이 현저해지면서 낭만주의적 성향들이 싹트고 자라나서 어느 순간엔가 지배적인 성질을 획득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 어느 순간에 해당하는 시기가 대체로 18세기 초중반, 그러니까 고전주의와 계몽주의가 한편으로는 절정에 이르고 한편으로는 쇠잔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문학사가들의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이시기를 전후해서 낭만주의의 조짐이 하나 둘 나타나고 현저해지면서 시대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낭만주의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구체적으로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부각되어 사회의 이목을 끌고 논의의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그리고 낭만주의가 존속했던 전 기간은 대체로 뒷날에 혁명의 시대로 불리는 시기와 일치한다. 1776년의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 1830년대의 크고 작은 여러 왕조 혁명들, 1848년의 파리콤뮨등이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가 시대를 지배하는 주조적 문예사조로 자리를 잡는 것과 이 혁명들 사이에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한 가능성과 함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낭만주의의 발생은 이 혁명들과의 관련 아래서 주로 해명되어 왔다. 특히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은 지속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낭만주의 발생의 2대 요인이다. 그러나 여기서 혁명과 낭만주의의 관련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어찌보면 혁명은 낭만주의 발생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두 현상의 복잡한 상호관련을 논의의 필요에 따라 단순화하는 방식이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두 주요원인으로 거론하는 것도 당시의 삶의 복잡한 양상을 단순화하여 설명할 필요에 따른 조처일 뿐이다. 그 혁명들에 의해서 근대사회의 중심계급이 되는 중산층은 과거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하여 현재와 유사한 사회구조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산업혁명은 생산의 합리화와 경영의 합리화를 지향했던 오랜 노력의 성과이다. 중세 이래 생산의 조직화와 합리화, 경영체계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어 왔고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이 요구에 일정하게 응답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응용과학 분야에서 이룩된 기술의 발전은 구체적으로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실증과학의 발전은 실제적 산업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오귀스트꽁트의 실증철학과 함께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이 분과과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며 근면 성실의 노동윤리를 강조해 온 칼뱅주의의 프로테스탄티 교의도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신대륙의 발견과 같은 지리상의 발견은 무한한 시장을 산업가들의 눈앞에 제시하는 것이었으며 아담 스미스의『국부론』은 자유무역, 자유 시장경제, 자유경제라는 자유경제체제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개인의 산업 활동이 공공의 이익에 봉사하고 궁극적으로 전체 사회의 조화로운 경제운영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 사상은 중산층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자유주의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고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산업혁명은 사회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다.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부근의 공장으로 몰려들게 됨으로써 삶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된것은 물론 사회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을 떠나 새로 조성되는 이익사회의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선 기계적인 절차를 갖는 노동과정의 소외된 형식에 적응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고립된 개인적 삶의 방식을 유지해야 했다. 여기서 극단적인 물질주의, 개인주의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하고 그 경쟁 속에서 무자비한 개인주의가 용인되고 자본이 분리되면서 노동의 비인격화, 사물적인 인간관계 등의 생활방식 즉, 찰스다윈의『종의 기원』에서 표현되는 적자생존의 생활방식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개인주의는 경제는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생긴 개인의 자유 개념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의 기계화라든지 비인간화에 대한 개인들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낭만주의의 주정주의는 자신의 인간성을 확인하고 주장하려는 시인, 작가이 소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에 의해 시작된 대 공장제는 사람들을 인격체로서보다는 노동단위로서 모두 똑같은 역할을 하는 기능의 담당자로 만들었고 다른 반면에 생산물을 소비해야 하는 규격화된 상품의 구매자로 만들었다. 개인적인 생활에 있어서 노동자들은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이름 없는 엑스트라의 역할에 만족하게끔 강요받았다. 낭만주의의 시인, 작가들이 이러한 비인간화에 대해서, 사회의 획일화와 규격화에 대해서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게 된 것은 기성질서로 확립되어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부정성에 대한 부정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의 생활의 물질적 기반에서 일어난 변화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한다면 프랑스혁명은 사회체제의 문제를 집단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 점진적으로 사회의 물적 기반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부르주아지가 현실적인 제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중과의 연대하여 변혁을 꾀한 것이 프랑스혁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의 운동에 장애가 되는 기성체계를 사회의 실질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부르주아에게 적합한 형태로 변화시키는 작업의 의미를 지녔다는 관점이다. 낭만주의가 이 혁명과 맺는 관계는 복합적인데 루소의『사회 계약론』이 끼친 영향은 낭만주의적 사상이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