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Goya와 근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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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Goya와 근대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Goya와 근대성
1. 고전주의 시대 속에서 희생된 재능 : 1746년~1771년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사라고사에서 가까운 푸엔데토도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활동하던 금세공사로 솜씨를 인정받은 장인이었다. 고야가 어떻게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열서너 살이 되었을 때 호세 루산을 스승으로 삼았다고 알려졌다. 루산은 궁정 화가였던 실력 있는 화가로 훗날 사라고사에 최초로 정식 미술 아카데미를 건립했다.
고야는 당시 미술 아카데미에 진학할 것을 희망했다. 미술 아카데미는 미술 전문 교육기관으로 아카데미 교수들은 그림을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체계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그림의 주제에 대해서 엄격한 등급을 두었다. 제일 가치 있는 등급은 위대한 사상과 도덕적인 내용, 즉, 종교, 역사, 문학, 신화 등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삼는 것으로 ‘역사화’라 불리는 것이었다. 둘째 등급은 초상화나 장르화였고, 그 아래 등급으로 풍경화와 정물화가 있었다. 일단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그리고 싶은 그림을 다 그릴 수 없었고, 자기 방식대로 그리는 것도 금지되었다. 어떤 화가가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일일이 세부규정이 정해져 있었고, 화가는 반드시 아카데미의 규칙을 준수해야 했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빚은 듯이 매끄럽고 흠 없이 아름다운 고전 고대의 조각상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고전주의의 규율로서 선을 사용해서 소묘를 그릴 때에는 한 군데라도 흐릿한 부분이 없이 깨끗하고 말끔하게 완성되어야 했고, 색채 사용에서도 원색을 선호했다. 그림의 골격을 이루는 구성들은 비례가 잘 맞는 조화로운 형식을 취해야 했다. 이런 아카데미의 시험에 고야가 응시했고, 입학생을 선별하는 아카데미 교수들의 눈에 고야의 화풍은 너무 독단적이었다. 결국 1763년 첫 입학시험을 치른 고야는 낙방했다. 3년 후 다시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지난번과 같았다.
이 후 몇 년 뒤 고야는 이탈리아로 떠난다. 당시 유럽의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이탈리아였으므로 로마에 체류했었다는 경력이 있으면 웬만한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고야는 여러 미술 아카데미 중 하나인 파르마 아카데미 시험에 응시했다. 비록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심사위원 여섯 명의 찬성으로 합격을 하게 된다. 그는 곧장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간다. 그의 이탈리아 아카데미 합격 소식이 알려지자 엘 필라르 대성당에서 그에게 대성당 제단부의 천장 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여러 교회와 관련된 작업을 하면서 교회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2. 창조적인 예술가와 화려한 궁정 화가사이의 갈등 : 1775년~1792년
고야는 사라고사를 떠나 마드리드로 갔다. 그곳에서 고향친구 프란시스코 바예우가 마드리드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입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1773년 7월 25일 바예우의 여동생인 호세파 바예우와 결혼을 한다. 이로써 처남이 된 바예우를 마드리드 궁정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게 된다. 기대하던 대로 바예우의 추천으로 고야에게 작품 주문이 오면서 궁정의 화려한 무대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당시의 주문은 산타 바바라의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데생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궁정의 전속 예술가가 되어야 맡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작업이었다. 이때부터 고야는 궁정의 왕족들이 사용할 태피스트리를 비롯해 초상화 등 여러 작품을 그려내었다. 물론 귀족들의 마음에 들어야하기 때문에 고전주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아름답고 밝은 분위기의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이전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사람들의 생동감과 표정이 살아있다.
그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에 부응하려 나름대로 노력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재능, 그리고 예술가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관습화되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그 시대를 숨 쉬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아래의 그림 ‘겨울 la nevada o el invierno’이다. 당시에는 사계절을 그릴 때 기호와 같은 것들을 그림의 곳곳에 표시하곤 했다. 봄은 꽃, 여름은 밀짚, 낫, 그리고 태양을 상징하는 횃불, 가을은 포도, 겨울은 장작불이나 죽은 날짐승 등으로 표시했다. 사람들은 이런 상징들을 보고 그림이 그리고자 하는 계절을 알아낼 수 있었다. 고야도 역시 이러한 상징들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표현해 내는 데 있어, 그리고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남달랐다. 다른 작가들은 겨울을 따뜻하고, 포근한 즐거움으로 그려내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겨울은 말 그대로 겨울의 매섭게 추운 눈보라와 황량함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또한 세 남자가 덮어 쓰고 있는 옷자락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펄럭이는 옷자락이 자주 등장한다. 펄럭이는 옷자락은 인물을 생기 있게 보이게 할 뿐 아니라 인체를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배경을 제공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옷자락은 신과 영웅들, 또는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야는 이런 옷자락의 움직임을 농부들을 그리면서 사용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옷주름이 지금까지 영웅적 소재로만 사용되었다는 미술 전통이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옷자락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나 줄거리의 문제보다 옷자락의 모양과 생김새가 만들어 내는 형태의 문제, 그리고 사실성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는 도덕의 시대였다. 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행실을 체계적으로 구분해서 도덕과 타락의 두 가지 잣대로 갈랐다. 이에 타락과 패륜을 주제로 한 동판화를 제작하고 사람들을 유혹으로부터 건져내려는 목적의 계몽적인 미술이 크게 유행했다. 여기에 고야도 합류한다. 30대로 접어든 고야는 관심이나 신념 면에서 궁정 측과 뚜렷이 대조되는 입장에 서 있는 전혀 새로운 사회단체에 가입한다. 그것은 ‘ilustrados, 즉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군주제를 비판하는 철학자들, 역사가들, 경제학자들, 작가들의 세계였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고야는 시사성 높은 주제, 교회 권력 대 국가 권력, 문화 및 산업의 후퇴, 광기로 관심을 돌린다. 이런 자신의 생각을 그는 자신의 판화집 에 못된 짓을 하는 설교자들, 돈만 챙기는 약삭빠른 의사들,당나귀처럼 어리석은 학자들을 우화적인 모습으로 등장시킨다. 이런 그의 판화집을 두고 좋지 않은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단 재판소에서도 고야의 그림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1789년 유약한 성격의 카를로서 4세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다. 같은 해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발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소식은 스페인 왕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고야는 스페인에서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초상화와 활기 넘치는 시민들을 소재로 한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다.
3. 혁명과 전쟁, 그리고 죽음 : 1792년~1828년
그는 1792년 갑작스럽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중병을 앍은 다음 청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인생의 전기를 맞은 고야는 이후부터 밝고 따뜻한 그림 대신에 섬뜩하고 공포스러운 그림을 시작한다. 산적떼의 습격, 난파서, 대화재, 정신병동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주제였다. 악마와 마녀들이 우글거리는 기괴하고 음산한 분위기로 그림을 채웠다.
1799년 고야는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 후 왕실 가족의 단체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여기서 그는 왕족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카를로서 4세 가족의 그림은 지금까지 그려진 어떤 왕실 초상화와도 기법이 달랐다. 매부리코를 곧게 피거나 뾰족하고 보기 싫은 턱 등을 보기 좋게 고치는 것이 궁정화가들 사이의 관례였지만 고야는 본 대로 생긴 대로 그려냈다. 또한 그림 속의 구성원들 모두 매우 화려하게 궁정복장을 차려입고 있으나 다들 불안한 자세에 위엄을 찾기는 힘들다. 아직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 정면을 보지 않아 옆모습만 나온 이도 있고, 다른 사람의 뒤에 가려 얼굴만 간신히 나온 사람도 있다. 또한 화면의 중심에는 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서있다. 고야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빗대기 위해 고의적으로 이러한 화면구도를 잡았다는 설도 있다. 고야는 이 왕실 초상화의 한 구석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자신은 왕족과 대비되는 어두운 그림자에 잠겨 있다. 이것은 화가와 왕실 가족이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서로 다가설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왕실 초상 가운데 거의 마지막 그림으로 제작된 이 초상화에서 고야는 봇의 힘이 권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교회를 위한 그림을 그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화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교회를 위한 그림이 아닌, 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로써 또한 그는 교회와 이단 재판소로부터 눈총을 받게 된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의 새로운 황제 나폴레옹이 1808년 스페인으로 진격해서 부패한 통치자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를 축출한다. 그러나 스페인 민병들의 소요가 끈질기게 일어났고, 끝도 없는 소모전으로 많은 병사를 잃고 지쳐버린 프랑스 점령군은 맥없이 스페인에서 퇴각했다. 군인들은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야만성과 잔혹한 본성이 전쟁을 통해서 분출되었고, 이것을 고야는 자신의 화폭에 담았다. 그는 라는 판화집을 또 한번 만든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엘케 폰 라치프스키, 혁명아인가 출세주의자인가, 1998
자닌 바티클, 고야 황금과 피의 화가, 1997
박홍규,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2002
이반 나겔, 고야 뚜쟁이인가, 예술가인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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