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예학의 강화-김장생, 송시열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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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예학의 강화-김장생, 송시열의 사상
1. 시대적 배경
1) 왜란과 호란의 영향
당시의 조선 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신분제가 동요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사대부들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회복하여 강상(綱常)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기존의 예제와 예정신을 더욱더 엄격히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종법에 기초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깊이 연구하고 일상생활화 하여, 유교적 국가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강상(綱常) 윤리: 윤리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도덕규범을 의미 한다. 강상(綱常)은 유교문화에서 사람이 늘 지키고 행하여야 할 덕목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뜻한다
2) 성리학 발달의 자연스러운 결과
16세기에 성리학이 융성한 뒤 17세기에 예학이 발전한 것은 조선유학의 전개상 자연스러운 일로서, 성리학 시대를 이어 예학이 대두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성리학에 입각한 17세기 예학정신은 천리(天理)에 따르는 예제의 확립을 추구하며, 성리학의 바탕 위에 예의 형식적 준행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준행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 이해 할 수고 있다.
3) 왕실의 전례(典禮) 논쟁으로 인한 파급효과
인조 대 원조추숭문제(元宗追崇問題)와 현종대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服喪問題)등 왕실의 전례문제가 제기되어, 조신(朝臣)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이 전례논쟁에 참여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예제와 그 근거 논리가 당시 사대부들의 연구와 저술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2. 예학의 강화
1) 천리(天理)와 예제(禮制)
17세기 예학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한다(存天理 去人欲)’는 이기성정(理氣性情)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리설에 대한 이해 없이는 17세기 예학을 이해할 수 없다. 예학은 성리학의 ‘존천리(存天理)’를 철학으로 하여 천리의 ‘절문’을 밝히고, 사회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理)는 인간에게 내재하며, 이것을 객관적인 예제에 의해 행할 때에 개인국가세계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예학자들은 예가 단순히 외제적인 규범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이(理)를 발휘하는 수단이라고 인식했다. 예학자들은 예학이 천리에 근거를 두었고, 그것은 인간에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천리와 합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예를 통해 마련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학의 본령은 예를 실천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려는 것이며, 이는 천리에 대한 규명과 체득이 그 바탕이 된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1997, 262~3p
2) 예(禮)와 자기 절제의 정신
예학이 추구하는 바는 극기복례를 통해 천인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극기복례란 인간 개개인이 이기심이나 욕심을 극복하고 사회의 객관적인 예제를 준행하여 사회의 안정과 조화를 이루며 이러한 가운데서 개개인의 삶을 완수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예학자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정(私情)을 억누르고 예를 따른다’는 것이다. 예는 자신의 명(名)과 분(分)에 넘치거나 허식이 있어서는 안되며, 이는 극기라는 내성적 수양 과정을 거쳐 사정과 사욕을 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극기를 통해 어질고 선한 자기 본성을 깨닫고, 이로써 스스로 자율 의지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자기를 극복하는 수련 자체가 예의 실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극기하는 과정이 예를 실천하는 일상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예로써 절제하고 예를 실행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1997, 263p
3) 예제(禮制)와 종법 질서
예학자들이 예제 시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례』는 종법(宗法)을 토대로 하며, 종법은 조선조 사회 질서의 근간이었다. 조선조에 이룩한 제도상의 변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종법 제도의 정착이다. 예학이 발전한 17세기는 조선 초기 이래로 정착시키고자 했던 종법 질서가 정착된 시기로 종법 질서의 확립으로 인해 친족 제도가 부계 중심적 종족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문중 중심적인 사회 질서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가정에서 종자(宗子)와 가부장의 권한이 강화되고, 검박하고 근면한 부인상이 확립되었다. 혼인 문제에 있어서는 동성동본간의 혼인과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였다. 여자는 부계 가족을 위해 희생하여 재혼을 하지 않는 열녀를 이상형으로 삼아 수절을 강요하게 되었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1997, 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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