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 - 예학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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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중기 - 예학의 강화
1. 시대적 배경
1) 왜란과 호란의 영향
당시의 조선 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신분제가 동요되고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이에 사대부들은 무너진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회복하여 강상(綱常) 윤리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기존의 예제와 예정신을 더욱더 엄격히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종법에 기초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깊이 연구하고 일상생화화하여, 유교적 국가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한국철학사 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1997, p.218참조
2) 성리학 발달의 자연스러운 결과
16세기에 성리학이 융성한 뒤 17세기에 예학이 발전한 것은 조선유학의 전개상 자연스러운 일로서, 성리학 시대를 이어 예학이 대두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성리학에 입각한 17세기 예학정신은 천리(天理)에 따르는 예제의 확립을 추구하며, 성리학의 바탕 위에 예의 형식적 준행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준행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 이해 할 수고 있다. 한국철학사 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1997, p.218참조
3) 왕실의 전례(典禮) 논쟁으로 인한 파급효과
인조 대 원조추숭문제(元宗追崇問題)와 현종대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服喪問題)등 왕신의 전례문제가 제기되어, 조신(朝臣)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이 전례논쟁에 참여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예제와 그 근거 논리가 당시 사대부들의 연구와 저술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한국철학사 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1997, p.218참조
2. 예학(禮學)의 강화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도학자들은 구체적인 예제의 정립과 실천을 통해 도학 정신이 현실에 직접 구현된다고 여겼다. 성리학 이론을 구체적으로 규범화한 것이 바로 예학인 것이다. 그래서 몸소 엄격하고 철저하게 예를 실천하고 당시의 상황에 맞는 예제 질서를 확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런 측면에서 예학의 발전은 성리학의 학문적 연구가 심화된 결과이다. 또한 양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를 재정비할 필요가 생기면서, 당시 지배층의 사상인 성리학에 따라 유교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강상윤리를 재건하기 위해 예제의 확립과 예의 정신을 강조하게 된다. 이는 예의 실천 윤리적 성격과도 맥을 같이 한다. 김윤경, 『청소년을 위한 한국철학사 , 두리미디어, 2001, p.183참조
유학의 예(禮)가 구체화된 것은 주초(周初) 즉 문(文), 무(武), 주공(周公) 대로 보이지만 그 기원은 더 멀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원시사회의 무속, 그 중 특히 제천의식에서 행해지던 금기(禁忌)의 관습에 예의 기원이 있다. 무속으로서의 종교적 제사의식에 잇는 신성(神聖)과 부정(不淨)의 관념을 기초로 하여 행위를 일정하게 규제하던 금기로부터 예가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발생된 예는 주대(周代)에 들어와 일상적인 세속의례와 특수한 종교 의례로 분화되고 귀족의 예와 평민의 예 도한 상이하게 형성되기에 이른다. 유가의 예는 주로 당시 귀족의 세속의례였다. 원래 유자(儒者)란 주말(周末) 이후 예를 집단적, 사회적으로 실현케 한 지도자 내지 교육자를 의미한다. 유자를 가리켜 ‘상례자(相禮者)’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최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理解』, 새문사, 2008, p.229참조
성리학에서는 예를 매우 중시한다. 단순히 예를 중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선진유학 이후의 예 사상을 계승하면서, 그 예에 대한 형이상학적 합리화의 작업에 철저한 것이 곧 성리학이다. 최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理解』, 새문사, 2008, p.229~230참조
우리나라에서 예 의식 및 그 시행은 바로 성리학의 수용과 대를 같이한다. 선초에는 일반적으로 예 의식의 계몽 및 그 보급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주자가례(朱子家禮)』,『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오례의주(五禮儀註)』등은 그 좋은 예 이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도『소학』의 이해와 실천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는『소학』이야말로 바로 성리학적 예 의식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16세기 중·후기에는 향약의 발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향약은 그 역사가 오래 된 것이지만 우리의 지역적 특수성에 맞는 예속화의 수단으로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상 이 때부터이다. 최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理解』, 새문사, 2008, p.230참조
17세기에는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예가 중시되었는데, 당시는 관학화된 성리학을 바탕으로 예의 실천이 본격화된 지 2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단순히 『주자가례』중심의 예 정도로는 충족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대부들은 주희 이외의 학자들의 학설에까지 눈을 돌려 예설의 시야를 넓히는 한편 『주자가례』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론된 예의 세목들을 추구 수집하였다. 그 결과 당시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는 곧 예학자로 불리게 되었으며 성리학은 예학으로 대칭 되기도 하였다. 최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理解』, 새문사, 2008, p.230참조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윤경, 『청소년을 위한 한국철학사 , 두리미디어, 2001.
금장태, 『유교의 사상과 의례』, 2000, 예문서원
최현규, 『한국전통윤리사상의理解』, 새문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야기 한국철학2』, 1996, 풀빛
한국철학사 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 1997
배상현, 「조선조 기호학파의 예학사상에 관한 연구 - 송익필 김장생 송시열을 중심으로」, 1991, 고려대학교 박사논문
* 생각해보기
1. 김장생은 예학을 정비하여 의도적으로 예를 행하게 했을 때 바른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예와 같은 외적 규제를 통해 바른 정신이 구현될 수 있을까?
2. 송시열은 주자가례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이론을 제시한 윤휴 등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러나 지나친 현실주의가 예의 체계 자체를 무너뜨린 경우도 있다. 예에는 기준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어디까지 가능할까?
3. 정명론에 기초한 예학은 조선 사회의 역동성을 가로막은 폐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예를 통한 규제는 과연 정당한지, 필요하다면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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