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의 성립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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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단칠정의 성립배경
1. 시대적 배경: 성리학의 수용과 전개 과정
-사화와 성리학의 토착화
16세기 초에 해당하는 중종초기에 기묘사림(己卯士林)으로 불리우는 조광조등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 이념을 현실사회에 정치적으로 구현하고자 진력하였으나 중종14년(1519년) 기묘사화로 좌절되었다. 중종후기에는 권습(權習) 조식(曺植) 서경덕(徐敬德)등이 등장하며, 명종 대에는 이언적(李彦迪) 이황 기대승(奇大升)등 100여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학문 활동을 통하여 연구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 시기에 『주자대전』이 수입되어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황의 『주자서절요』와 기대승의 『주자문록』은 주자학에 대한 학습이 얼마나 정밀한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황보다 한 세대 후인 선조대에 율곡 이이가 출현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상윤이 조선성리학의 육대가(六大家)로 거론한 서경덕, 이황, 이이, 기정진, 이진상, 임성주 가운데 그 절반이 이 시기에 몰려 있는 셈이 된다. 16세기는 이른바 사대사화로 불리우는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년)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년) 기묘사화(중종14년, 1519년)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년) 가운데 3회의 사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사림들이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이 시기에 사단칠정론으로 대표되는 정밀한 이기심성론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퇴계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한 단서를 발견할 수가 있다.
“정암 조광조는 천품이 진실하고 아름다웠지만 학문적 역량이 미흡하여 그의 행위가 지나침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침내 일을 그르치게 된 것이다. 만약 학문적 역량이 충분히 갖추어지고 덕이 성취된 뒤에 나아가 세상의 일을 담당하였더라면 쉽게 헤아리기 어려울만큼 커다란 업적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글에서 퇴계는, 정암을 위시한 사림들이 순결한 이상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현실 정치에서 실패하게 된 이유를 ‘학문적 역량의 미흡’에서 찾고 있다. 즉 ‘지치’라고 하는 성리학의 이상적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불충분했다는 자기반성이다. 정치현장에서부터 물러난 사림들이 치열한 논변을 통하여 이기심성론을 발전시켜, 마침내 조선성리학의 기초이론을 정립하게 된 이유는, 순수한 학문적 동기이외에 이와같은 문제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성리설 가운데에서도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등 심성론이 중심 주제로서 논의된 이유를 해명할 수 있다. 정치 경제 등 사회적 모순의 근본요인을 인간의 심성에서 찾는 것이 유교, 특히 성리학의 기본관점이다. 즉 외적인 문제는 내적인 양심의 문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은 사화기와 경장기라는 시대상황이 제기하는 문제점의 근본적 해결책을 마음에서부터 모색하였으며, 그 이론적 기초로서 이기론을 정립한 것이다. 그들이 정립한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토대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라는 학파가 형성되어 조선 후기의 문화와 사상 그리고 정치 경제등 사회 전반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으로 토착화되어 한국 사상사의 커다란 줄기를 이룩하였다.
2. 이론적 배경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 도입된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으로 설명할 때 각각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단칠정논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정지운(鄭之雲 : 1509~61)의 〈천명도 天命圖〉에서도 사단의 발은 순리이며 칠정의 발은 기가 겸한 것이라고 했다. 이황(李滉 : 1501~70)도 역시 이 〈천명도〉를 수정하면서,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 혹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 하여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에 기대승(奇大升 : 1527~72)이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이황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8년에 걸친 사단칠정논쟁이 이루어졌다. 사단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커다란 철학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이 시기 조선 성리학에 이제까지의 이기이원론과는 다른 이기일원의 이기론이 성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있었다.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이기이원론은 이를 기의 존재 근거로까지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키며 이기일원론은 이를 기의 조리(條理)로만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킨다. 이러한 차이가 사단칠정론에서는 기발과 함께 이발을 인정하는 견해와 기발만을 인정하는 견해로 나타난다. 이황은 이기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기일원론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설명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명확하게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이기의 관계가 비록 밀접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之)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 해도, 사단은 그것이 유래하는 바가 마음 속에 있는 본연지성이요, 칠정은 그 유래하는 바가 기질지성이며, 또 사단은 기가 따르는 것이지만 주로 하여 말하는 것(所主而言)이 이에 있고 칠정은 그것이 기에 있기 때문에 각각을 이지발과 기지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사단칠정 문제에 대한 이황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이라 불린다.

사단칠정론은 성리학의 기본개념 중 하나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말한다.
1. 사단
측은지심: 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 자신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