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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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도산 안창호 [ 島山 安昌浩 ]
1878∼1938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출생 : 1878년 11월 9일 조선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초리7리 봉상도(도롱섬)
사망 : 1938년 3월 10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사인 병으로 휴양 중 사망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본 제국
별칭 : 도산(호)
직업 : 독립운동가, 교육자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1])는 대한제국의 개혁, 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순흥으로 호는 도산(島山)이며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이 저지른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사망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으며 연설과 웅변에 능하였다. 호인 도산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도롱섬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이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평안남도 출신이다.
안창호는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강연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때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안창호는 곳곳에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고,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안창호는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회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이 빼앗자,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 정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하였고 또한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한협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도산은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연에 참여해 연설을 하였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로 한다.
한일 합병 이후인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8년말, 1919년 4월에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의 대표자로 이승만을 파견하였으나 미국 국무성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되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를 소집하였다. 임시정부 내무부총장인 안창호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 참석 중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내무부 총장에 선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안창호도 연사로 참여하였다. 그 뒤 여러 곳 각지에 선출된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일은 안창호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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