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전환기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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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근대전환기 철학
1) 척사위정 사상의 배경
조선 말 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하고, 북경이 영불 연합군에게 함락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시기와 맞물려 서구 열강이 직접 선박을 몰고 와서 수시로 통상 압력을 가해오자 척사위정론자들은 쇄국책과 내수책을 내놓으면서 쇄국정책을 지지하는 배후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척사위정론의 역사적·사상적 연원은 멀리 병자호란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곧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한 소중화론(小中華論)의 제기,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에 대한 수차례의 탄압 등은 척사위정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19쪽 참조.
2) 척사위정 사상의 역사적 의미
여태까지의 위기의식이 천주교의 전래에 따른 전통적 가치 질서의 혼란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싹튼 위기의식은 외압의 성격이 군사적·경제적인데다 또한 직접적이고도 강력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 대응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의 운동 형태로 발전해 갔으며, 아울러 반침략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19쪽~220쪽 참조.
3)척사위정 운동의 전개
①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쳐 개항 이전까지 대원군의 쇄국 정책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가운데 척사위정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의 상소를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당시 세계사의 흐름, 침략의 성격에 대한 인식과 대비책 및 한계 등을 엿볼 수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20쪽 참조.
첫째, 이항로는 서양을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간의 윤리라든가 태극과 같은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는 없이 재화와 여색만을 중시하는 오랑캐로 여긴다. 이것은 병자호란 이후 기호 노론들이 정권이 지켜 온 화이 사상의 연장인 셈이다. 둘째, 서양의 상품에 대해서 모두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는 분명 인식의 한계가 있으나, 서양의 상품이 공산품인 반면 조선의 상품은 농산품이므로 서로 통상을 하게 되면 조선 경제가 피폐해진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날카로운 통찰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러 통찰이 당시 서양의 자본주의적 침략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셋째, 이항로는 대외적으로 국방력의 강화를 통한 척화(斥和)를 주장한 한편, 대내적으로는 나름의 내수책(內修策)을 내놓는다. 이 내수책은 인심의 수습과 같은 것이 핵심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여기에서도 인식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20쪽~221쪽 참조.
② 고종 이후 병자수호조약을 맺는 1876년을 전후한 시기: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고종은 민씨 척족 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의 통상 요구를 받아들이는데, 이에 대해 기호 노론 안에서도 화서(華西) 학파가 중심이 되어 다시 척사위정론을 제기했다. 이때 제기된 척사위정론은 처음과는 달리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성격을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김평묵(金平), 홍재구(洪在龜)가 중심이 되어 지은 연명 유소遺疏와 최익현(崔益鉉)의 이른바 ‘오불가소(五不可疏)’인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주장은 이전과 다르게 일본과의 개국 통상 때문에 제기된 것이기 때문에 척사의 주된 대상도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 일본이 교린(交隣)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서양과 똑같다는 ‘왜양일체론을 내놓게 된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2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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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880년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 온 후 1881년 고종의 윤음 조선시대 국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
이 내려지기까지: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일본에서 가져오면서 영남 유생과 관동 유생 및 기다 경기·호서·호남 지방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한 전국적인 척사위정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당파를 넘어선 범재야 유생들의 운동이었다. 영남 남인과 김평묵을 중심으로 한 일부 기호 노론이 연대한 점은 당파와 학통으로 깊이 멍들어 있던 조선 후기의 정치사를 생각해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시기 척사위정 운동은 일본과의 개항 통상을 전통적 교린의 연장선에서 일단 인정하였지만, 서구 열강과의 개항 통상은 반대하는 내용이므로, 이미 개항 통상이 일반화되는 추세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221쪽~222쪽 참조.
4) 척사위정론의 학자별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