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기정진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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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노사 기정진의 사상
기 정 진 : 성리학의 탁월한 이론가
독창적인 유리론(唯理論)의 제창
그는 이렇다할 스승의 탁월한 지도나 학문이 심오한 인물로부터 사사받지 않고 오직 독학에 의지하여 성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하여 그는 후인들에 의해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퇴계율곡 이후 300년 동안 지속되어온 이기론(理氣論) 논쟁에 매듭을 지었다.
그는 이(理)에 대한 해명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성리학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일원적으로 통일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치밀한 논리적 사고에 바탕을 두었던 까닭에 이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도 기여함으로써 19세기 성리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는 40대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론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30대까지 오로지 학문의 깊이를 더하는데 노력하다가 40대에 이르러서야 서서히 자신의 설을 내놓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저술은 즉흥적이고 직관적이기 보다 원숙성과 단단한 논리에 뒷받침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고(長考)의 심오함이 어우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독창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저술로는 [납량사의(納凉私議 ; 46세 집필하여 77세에 수정)], [정자설(定字說 ; 48세)], [우기(偶記 ; 48세)], [이통설(理通說 ; 56세)], [외필(猥筆 ; 81세)]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그의 문인(門人)들과 성리학에 관한 의견을 함께 나눈 내용이 담겨진 [답문유편(答問類編)]도 빼놓을 수 없다.
노사는 위의 저술을 통하여 주로 이(理)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얼마나 이를 강조하였는가는 다음의 사실로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는 천하의 대변(大變)을 세 가지로 파악하였다. 즉, 부인이 남편의 자리를 빼앗는 것(妻奪夫位),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는 것(臣奪君位), 오랑캐가 중화의 자리를 빼앗는 것(夷奪華位) 등을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혁은 기(氣)가 이(理)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리학의 중심은 곧 이(理)로 파악함으로써, 후일 그는 유리론자(唯理論者)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천하에 씨가 없이 생겨난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이여! 이여! 그야말로 만물의 씨앗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이어 그는 필생의 역작 [외필]에서 이와 기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움직이거나 고요한 것은 기(氣)이고,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니,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위의 글에 나타나 있듯이, 기는 스스로의 작용성(作用性)이 없고, 이만이 그 주재성(主宰性)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理)를 중심으로한 일원적인 세계관을 주장하였다. 그의 경세관(經世觀) 역시 이것과 표리관계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사상이 전혀 새롭고 독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생들의 사이에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중암(重庵) 김평묵(金平)은, 스승없이 학문의 심오함을 터득한 노사의 학문에 경탄하였으며, 특히 [외필]에서 논의한 화이론(華夷論)의 분석이 한 칼에 두 쪽을 낸 듯 분명하다고 호평하였다. 그런가 하면, 주기론(主氣論)의 학맥을 자처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경우에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기정진이 죽고난 후에 그의 문인들과 간재와 그 문인 사이에 치열한 논전(論戰)이 전개되었음은 물론이다.
논란의 장(場)을 제공한 학설을 수립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학문적 깊이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문적 경지의 심오함은, 물론 당시 학자들에 의하여 인정되었다. 당시 학자들 사이에 장안의 만 개의 눈이 장성의 한 눈만 못하다(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라는 말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천리밖에 떨어진 외딴 시골의 외눈박이 선비를 서울의 수많은 선비들이 당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노사의 학문적 탁월함이 당대부터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체제동요를 막기 위한 구국방략
조선의 양반관료체제는 19세기에 이르러 심각한 상황에 처하였다. 노사의 학문이 날로 깊이를 더함에 반비례하여 조선은 더욱 위기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862년 임술년에 일어난 농민봉기는 중앙정부를 곤경에서 헤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봉기의 원인은 부패된 양반관료와 탐학한 아전들이 제공한 것이었다. 이른바 3정(三政)의 문란이 너무나 심각하여 농민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학문의 도야에 전념하던 노사였지만, 당시 농민의 처절한 울부짓음에 잠시도 소홀한 적은 없었다.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바로 민중의 계도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국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 관리와 유생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