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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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군정기의 교육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미군정기 교육의 실제 -교육정책과 정치동향
2. 미군정기 교육의 해석
1) 민족주의적 입장
2) 진보주의적 입장
3. 오천석을 중심으로 미군정기 교육 분석
Ⅲ. 결론
Ⅳ. 좀 더 생각해볼 문제 (우리 조가 토론한 내용)
: 현재에도 미국 교육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교육의 현실
【 서론 】
20세기 우리 역사는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어 왔다. 서구 열강의 한반도 침탈에 이은 일제 식민 지배, 그리고 해방이후 찾아든 분단과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를 심하게 왜곡시켜 왔다. 이러한 왜곡은 정치, 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왜곡된 양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 분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제시대 당시의 학교 규율이 아직까지 우리 학교 현장 속에 남아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조회, 종례나 권위주의적 교사의 모습은 일제시대 칼을 차고 교실에 들어왔던 교사의 모습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일제 식민지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서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는 현상은 일제 식민지의 부당함과 이후 계속되는 냉전 대립의 국제 정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이처럼 단순화하기 이전에 그러한 식민지 잔재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에서 흔히 무시되어온 ‘미군정기’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의 설립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역동의 시기에 국제 정세와 이에 대응하는 우리 태도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해방이후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기울였을 노력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리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3년간의 ‘해방 공간’은 우리의 뜻과 의지대로 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역사의 방향이 다소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육의 특성과 한국 교육이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이 전적으로 정치와 경제에 의해서 결정된다거나, 어떤 특정 계급의 의도에 의한 결과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곧, 교육체제의 형성과 변화과정에서 정치적, 경제적 요구와 특정 집단의 의도는 변화의 방향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 과정 자체와 결과까지 전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군정의 정책과 우리 민족의 노력이 서로 맞물려 상호작용하며 변화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해방 공간’의 특수성이 교육의 분야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보고 미군정기의 한국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 본론 1 】- 미군정기 교육의 실제
1. 미국의 대한 정책
- 미국의 대한 정책은 기술적으로는 과오가 있었지만 원칙은 성공적으로 고수하였다. 미국의 원칙은 소련의 영토팽창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었으며, 미국은 한반도가 소련의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가 소련에 의해서 단독으로 점령되거나 소련의 영향 아래 놓이는 것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일본까지 잠식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정책에서 원칙 고수에 철저하였다.
- 루스벨트가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정국을 구상할 때에는 미국의 소련에 대한 상대적 우위가 확실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기초하여 루스벨트는 국제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만큼 갑작스럽게 국제정세는 바뀌어갔고 소련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소련의 부상은 강력한 군사력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준 것으로서 전후 신생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소련을 견제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간접적인 방법인 국제주의 외교 전략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직접적으로 맞대응하는 방법인 강력한 군사력과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써 대처하려는 전략으로 선회하였다. 이러한 정황에서 외교채널보다는 군사채널이 정책결정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의 판단이 워싱턴에 거주하고 있는 직업 외교관이나 정치가의 판단보다 중요시되었다.
- 미국은 한반도를 미, 영, 중, 소 4개국에 의해 신탁통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한국인들의 격심한 반대에 부딪치자, 미국은 소련을 38도선 이북에 묶어두고 남한만이라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하여 차선책으로 남한 단독정부안일 실현시키기 위한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 과정은 남북북단을 기정사실로 하는 작업과 표리를 이룬다. 이 절차는 구체적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한국문제 유엔 산정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예견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2. 미군정의 기본성격과 정책 방향 : 대소 봉쇄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음
① 미군정 책임자들은 한국 대중들에 만연되어 있는 새로운 국가, 사회에 대한 기대가 사회 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대소 봉쇄정책이 최우선인 미군정청은 보수 세력의 한국인들에게 주목 이들을 등용하거나 자문인사로 이용
(기독교신자, 중산지주, 고등교육이수자, 친일 또는 부일 경력자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등용 - 경력과 학력으로 정당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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