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1  광장 -1
 2  광장 -2
 3  광장 -3
 4  광장 -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광장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광장
우리의 ‘광장’
광장은 최인훈의 대표작이면서 현대문학의 고전이다. 실제로 우리 문학사는 광장과 그 작가와 함께 6,70년대 한국문학의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광장을 읽으면서 이전에 맛보지 못한 폭넓은 사회, 역사적 관심사와 만났고 그것들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 만들어 내는 깊은 울림에 빠져 들었다. 지금도 광장을 읽은 독자들은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에 젖어 그 속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한다. 광장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다 되어 가도록 식지 않는 관심은 이미 우리에게 하나의 사회, 문화사적 사건이 되고 있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월북하고, 사랑과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려 고민하다 동지나(동중국) 바다에서 사라진다. 소설 속 그런 모습들이 광장발간 이후, 오랜 경직된 이념의 억압과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진정한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하고 세계와 자아에 대한 폭넓은 눈을 갖게 했을 것이다. 광장텍스트로서의 문제의식은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그리고 사랑을 통한 인간 본성의 문제에까지 접근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명준은 ‘광장’을 찾아 남과 북을, 그리고 한국전쟁의 한복판을, 그리고 그 뒤엔 제3국에 가는 뱃길에서 헤맨다. 물론 제3국에 가는 꿈은 그가 실종되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광장’이라는 표상은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 즉 이상 세계의 모습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소설은 한국전쟁 전후의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 4.19혁명을 성공한 기쁨을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장은 그동안 금기시된 소재를 사용한 것을 넘어서, 혁명의 정신을 발현시킨 작품이다. 최인훈은 민주주의와 근대성의 정착은 ‘광장’이라는 이상 속에 담아낸 것이다.
최인훈은 광장에 작가로서의 모든 열정과 능력을 쏟아 부었다. 먼저 출간 이후로 30년 가까이 지속된 군사정권 치하에서는 그와 같은 작품을 다시 생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마다 독자들의 요청이 달랐고, 그것을 좀 더 제대로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진화된 광장은 점점 완성된 형태를 지니게 되는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유신 정권 시절, 모두 최인훈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새로이 개작한 광장 하나만을 달랑 들고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치 광장의 개작이 귀국의 사유나 되는 것처럼. 또 마지막으로 개작한 것은 15년간의 절필을 끝내고 화두라는 금세기 최고의 대작을 발표한 직후였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광장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광장에서는 전쟁 전후의 남과 북의 현실과 이데올로기가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야기 되고 있다. 1950년대 작가들에게는 그 현실이 너무 혹독하여 한반도에서 터진 전쟁을 세계사적 안목으로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그들에게는 궁핍하고 비참한 현실, 부조리한 삶을 극복하는 일만이 과제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권 차원의 허울, 즉 정통성의 문제가 불거질까봐 탄압했기 때문에 그러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 또 실제로 언론, 출판의 검열자들이 남과 북을 공평하게 다루는 것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광장이후로 남북한 현실에 관함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다. 그것도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등 빨치산에 관한 이야기일 뿐, 인민군 장교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는 아직도 낯선 실정이다.
광장은 고뇌하는 인민군의 시선으로 배은망덕한 절망적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것이야말로 어설픈 계몽이나 풍속과 동떨어진 모더니즘, 또 무지한 상태에서 ‘생의 형식’을 찾는 데에 골몰하던 문학적 태도를 훨씬 벗어나 있다. 광장이 단순히 분단 현실만 다루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좀 더 근원적인 인간 내적 본질의 문제를 다루고 뛰어난 미적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소설 곳곳에 출현하는 환각의 장치들은 소설에 깊이를 부여하며 합리성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문제마저 생각하게 만들었다.
환각 속의 유토피아
최인훈의 소설에서 환각은 주체가 무의식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체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함부로 남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념 뒤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럴 경우 ‘헛것’ 혹은 ‘허깨비’로 이름 붙여진 것이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게 된다. 게다가 그것이 “밖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면서 가장 민감한 현실적인 것의 근원으로부터 솟아오른다. 그것이 때로는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란 걸 보아 자기 내면의 소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갈매기는 광장의 환각을 대표한다. 처음에 그것은 ‘탐스러운 뭉게구름’을 통해 ‘누드’를 연상시키는 ‘성적 욕망’과 같은 것이었다. 윤애가 바닷가에서 이명준을 밀쳐 내며 ‘저것, 갈매기......“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아 검열자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서두에서 ’얼굴 없는 눈‘으로 표현될 때,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 문득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은 새‘로 등장하는 데,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의미로서 은혜와의 사랑의 안타까움을 절묘하게 표현해 낸다. 그들의 사랑은 전쟁 중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이명준은 그 작은 새를 바라보며 ”비로소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파괴가 아니라 완성일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둔다. 이럴 때 갈매기는 삶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매개물이 된다. 환각은 단순히 개인적 소망을 넘어선, 주체 내부에 숨어 있던 무의식의 발현이면서, 심지어 집단적인 소망까지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광장에서 갈매기는 이명준 내부에 숨어 있던 무의식의 실상으로서 그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준다. 하지만 이명준은 그 자신이 ’부채꼴의 사북자리‘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어 죽음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동지나 바다에서 그의 과거가 부챗살처럼 떠오른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그는 마치 무당이나 된 것처럼 ‘신내림’을 체험한다. 그가 들고 있는 부채에는 ‘바다와 갈매기’가 그려져 있고, 또 실제로 갈매기들이 타고르 호를 뒤따라오고 있다. ‘부채꼴’ 속에 담겨있는 철학과 학생의 꿈과 두 여자와의 사랑, 그리고 남과 북에서의 방황. 그렇다면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를 이명준의 혼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싶다. 아마 그는 ‘부채의 사북자리’에서 날아오르기 직전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다에서 가장 큰 기쁨을 찾아낸 그는, 그 순간 그냥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그 어디에도 이명준이 자살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는 구체적으로 “5월 달 새잎처럼 싱싱한 새 삶”을 기다렸고, 심지어 병원 문지기, 소방서 감시원, 극장 매표원 등과 같은 구체적인 직업마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꿈꾸는 “코리아”는 불만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주민들의 불평에 정부 내각이 넘어질 정도로 민주주의가 잘 실현된 나라였다. 그런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나라를 떠나지만 나라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고, 훗날 통일된 고국으로 돌아올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전제를 할 때 갈매기는 이명준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의 모습이다. 무의식 깊숙이 숨어 있는 욕망의 얼굴이랄까. 그것이 전사한 은혜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두 마리의 갈매기는 못 다한 사랑의 꿈을 보여 준다. 그런데 한번 허깨비를 본 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걸까? 이명준은 부채꼴의 사북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인 뒤 사라지고 만다. 사실상 바다는 은혜와 딸을 되살려 낸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하나로 합해진 것이다. 이로써 이명준의 죽음은 신비로워진다. 죽기 전에 ‘작은 새’와 눈이 마주친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애를 떠올리며,”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깨달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푸른 광장’에서 하나가 된 행복한 순간의 이야기가 아닌가?
‘광장’의 본래 의미는 시민들이 합의를 모으는 공간이지만, 소설에서는 이명준이 꿈결에 아름다운 처녀를 만난 곳이고, 그곳에는 맑은 분수가 무지개를 그리고 꽃밭에는 싱싱한 꽃들이 만발해 있는 곳이다. 그러한 것을 이명준이 꿈꾸는 세계라고나 할까. 따라서 ‘광장’은 그가 책 속에서 찾던, 실재하기보다 이상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명준은 그것을 남과 북은 물론 제3국까지 찾아 나선다. 사실상 그 당시 분단의 현실에서는 광장으로 나가는 길이 봉쇄되어 있었다. 분단을 빌미로 억압만이 장행되었다. 아직 민주주의와 근대적 이상이 실현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한반도의 알 만한 주민들은 책과 현실의 불일치 속에서 절망하게 된다. 남한의 광장에는 탐욕과 부패가 가득했고, 북한의 광장에는 ‘당’을 위한 충성의 발언만 가득했다. 올바른 인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광장은 갈 수 없으되 가고 싶은,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다.
주체와 탈이데올로기
책 속에만 파묻혀 살던 이명준의 사회 입문식은 경찰서에 끌려가 신문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경찰서는 그에게 이데올로기적 호출을 하며 붉은 딱지를 붙인다. 그의 아버지가 북한의 고위 간부라는 것이다. 이로써 그의 호사스러운 관념의 꿈들은 모두 무너진다. 그가 남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도회에서 만난 윤애에게서 위로받고자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를 거부한다. 그는 결국 그녀의 몸만 탐하다가 파국을 맞이하고 아버지를 찾아 월북하게 된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기대라기보다는 남한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에서 북으로 넘어가고, 북에서 좌절한 뒤 은혜에게 기대고, 그리고 은혜가 죽은 뒤에는 제3국으로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