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사] 조선후기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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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음악사] 조선후기의 음악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궁중음악의 변화
2. 민간음악의 형성과 발전
본문내용
조선후기의 음악

이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때부터 갑오개혁(1894년)이 있었던 19세기 말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풍류음악의 발전, 일반 백성들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민속음악의 발흥, 아악의 쇠퇴 등을 가장 두드러진 양상으로 꼽을 수 있다.
음악의 갈래별로 그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궁중음악의 변화

(1) 아악
· 조선후기 아악은 임진왜란을 인하여 단절을 겪었으나 광해군 2년(1610년) 궁중음악을 회복하기 위하여 옛 음악과 옛 제도의 근거가 되는 『악학궤범』을 복각하였다. 인조와 숙종(1674~1720년)이 아악 복구를 위해 악기도감과 악기조성청등을 설치하여 제복과 악기들을 만들었으나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즉, 병자호란(1636)부터 인조 25년(1647)까지 약 1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사직(社程) · 문묘(文廟) 등의 제향아악은 다시 복구되어 그 명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구된 아악의 규모는 매우 축소되었다. 즉, 『악학궤범』에서 62인으로 되어 있는 등가 악생의 수가 20인으로, 헌가의 경우는 124인에서 22인으로 감소되었으며, 특히 등가에서 악장을 부르는 가자(歌者)의 수가 『악학궤범』의 24인에서 4인으로 격감되었다.

(2)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도 아악의 경우와 같이 병자호란 후 10년 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어 그 맥을 이었다. 연주규모도 감소되어 『악학궤범』에서 30인이었던 등가의 악공은 20인으로, 64인이었던 헌가의 악공은 21인으로, 등가와 헌가에서 노래를 담당하였던 가자의 수는 인조 때의 6인에서 2인으로 각각 감소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은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 결과은 향악도 아니고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였다. 즉, 조선 전기의 은 등가 및 헌가에 향비파 · 가야금 · 거문고 등의 향악기들이 함께 편성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악기편성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숙종대(1674~1720) 이후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악기편성 면에서 향악의 요소가 거의 배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에는 길고 짧은 음의 결합으로 연주되던 의 음길이가 등시가로 변함으로써 향악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출처: 한국음악개론 저자:손태룡
국립국악원, 새로운 한국음악사 저자:전인평
알기쉬운 국악개론 저자:이성천
http://www.ncktpa.go.kr/html/jsp/ncktpa_2006/e00_data/e02_km_history_05_02.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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