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수원화성, 화성행궁, 화령전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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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보고서] 수원화성, 화성행궁, 화령전 답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정조(正祖)

화령전 內 정조 어진
1.생애

2. 당시의 시대상황

3. 수원천도(수원 신도시 건설)

4. 장용영

5. 무예 24기

Ⅱ화성행궁

1.소재지

2. 개요

3. 배치

4. 화성행궁의 역사

5. 건조물

6. 의의

Ⅲ. 화령전

1. 소재지

2. 개요

3. 역사

4. 건물배치

5. 화령전 원형고찰

6. 화령전 제례의식

Ⅳ수원화성

1. 개요 및 역사

2. 설치목적

3.의의

4. 현재 수원화성의 활용

5. 주요건물

6. 그 외 건축물들


본문내용
Ⅰ.정조(正祖)

화령전 內 정조 어진
1.생애
1752(영조 28)∼1800(정조24) 조선 제22대왕으로 재위기간은 1776∼1800년이며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다.
1752년(영조 28)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 장헌세자(莊獻世子) : 영조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그에게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으며,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라 장헌(莊獻)으로 추존
(일명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1759년(영조 35) 8살의 나이에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며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 효장세자(孝章世子) : 조선 후기의 추존왕. 영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0세에 죽어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왕세자가 되었다. 사도세자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養子)가 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에 82세로 연로한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왕에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였다. 또한 즉위하자마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홍인한·홍상간·윤양로 등을 제거하였다. 한편 세손 때부터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元嬪)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을 문형(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고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고 이때부터 조정의 문신들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강제(講製) 강제(講製) :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도 주관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宣傳官)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 1791년의 장용영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