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

 1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1
 2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2
 3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3
 4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4
 5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5
 6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6
 7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7
 8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8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선시대사] 조선 후기의 경제적 발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력의 발달
1. 인구의 증가
2. 농업 생산력의 발달

Ⅱ. 광작의 대두와 지주제의 변동 및 임노동의 발생
1. 광작의 대두
2. 소작료 형태의 변화
3.임노동의 발생
본문내용
Ⅰ. 인구의 증가와 농업생산력의 발달
1. 인구의 증가
1) 인구의 증감
조선시대 호구(戶口) 통계 자료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인구는 인조 17년(1639)의 152만 명에서 1910년에는 1293여 명이 되어 270년 동안 무려 850%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초기 50여 년 동안(1639~1693)에 152만여 명에서 700만여 명에 이르는 급격한 증가세(460%)를 이룬 것과, 말기 5~6년 동안(1904~1910)에 593여만 명에서 1293만여 명으로 경이적인 증가세(218%)를 이룬 것이 그 주된 원인이 되겠다. 이 밖의 시기, 즉 18세기 한 세기에는 대체로 710만 명을 전후로 하는 정체양상을 보였고, 19세기에는 그 초기에 잠시 증가세를 이루어 순조 13년(1813)에 800만 명에 육박했으나 그 다음 식년(式年)에 130만여 명이 감소된 뒤로는 650만~680만여 명을 오르내리는 정체를 이루었으며, 20세기 초에는 다시 100만 명 정도가 더 감소된 560만~590만여 명을 이루어서 순조 16년~광무 8년(1816~1904)의 약 1세기 동안에는 18세기 때보다 100만여 명이 감소되는 추세 속에서 정체와 감소가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강력한 쇄국정책, 즉 해금책(海禁策)으로 인하여 외국으로의 이거(移去)나 외국으로부터의 이입(移入)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인구의 증감은 거의 자연 증감에 따랐는데, 이러한 정황 속에서 아무리 17~19세기에 영농기술이 발달하고 경작지가 확대되어 토지생산력이 급속히 증대되었다 하더라도 인조 17년~숙종 19년이나 광무 4년~융회 4년의 인구 증가상은 상상 할 수도 없는 현상이 되겠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순조 16년~광무 8년의 정체, 감소상도 인구의 자연증가를 억제, 감하하는 극심한 재해, 질병들이 연속되지 않았다고 하면, 아무리 다산다사(多産多死)의 시기였다 하더라도 수긍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즉 이러한 조선 후기의 정부 집계 인구수는 그 모두가 실제의 인구수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1910년 5월의 민적(民籍) 실사에서 1904년보다 무려 690여만 명(110%)이 많은 1293만여 명의 인구로 파악된 것이나, 1925년에 1902만여 명의 인구가 집계된 것에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적 실정이나 인구의 연평균 증가율로 볼 때, 17~19세기의 인구추세가 정부 집계 인구수와 같아서는 1910년이나 1925녀의 이 같은 인구수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조선 후기의 실제 인구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부 집계 인구수가 실제와 다르게 파악된 원인은 주로 조선시대의 호적제도와 부세, 부역제도의 문란에서 찾아지고 있다. 조선 왕조는 전국의 호, 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3년에 한 차례씩 행정구역 단위로 호적대장(戶籍臺帳)을 작성, 보고하게 하였다. 이러한 호, 구의 파악은 공물의 책정과 군역, 부역의 차정(差定)에 기준자료가 되었기 때문에 당초부터 누락의 소지가 많았다. 일찍부터 농민층의 경제적 몰락이 재현, 확대되고 있었으므로 호구단자를 기재, 제출하는 호주에 의해서는 물론, 호적대장의 작성을 담당한 면(面), 이임(里任 )조선 시대에, 지방의 동리에서 호적에 관한 일과 그 밖의 공공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 ≒이장(里長)·이재(里宰)
과 색리(色吏) 감영이나 군아에서 곡물을 출납하고 간수하는 일을 맡아보던 구실아치
, 수령들에 의해서도 면, 리와 군, 현의 호구수가 적당히 조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영, 유아는 그 사망률이 매우 높았고, 현실적으로도 반드시 파악할 필요가 적었던 데서 호적에서 누락되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따라서 호적대장에 등재되는 인구는 당초부터 실제와는 크게 다른 일부 인구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정은 농민층의 몰락이 확대됨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갔다.
근래의 여러 연구에 따르면 실제 조선 후기의 인구수는 대체로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