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 다산 정약용과 `애절양`, `노인일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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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문학] 다산 정약용과 `애절양`, `노인일쾌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序論)
2. 정약용의 생애
3. 정약용의 사상
4.「애절양」과 「노인일쾌사」 분석
(1) 哀絶陽(애절양)
(2) 老人一快事(노인일쾌사)
5. 결론(結論)
본문내용
1. 서론(序論)
다산은 그가 살아가던 세상을 온통 썩고 부패한 시대라고 규정했고, 어느 것 하나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탄식했다. 다산은 전 생애를 통해 이 병들고 썩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강구하는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현실에 활용하면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개혁안을 마련해두었으니, 그게 바로 다산의 개혁사상이요, 실학사상이다.
국가의 행정제도를 비롯해 문물제도를 고치자는 ‘경세유표’에서 개혁논리를 찾았고, 고관대작부터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리들이 청렴한 공직윤리를 회복하고 철저하게 준법함으로써 바르게 고쳐진다는 ‘목민심서’에서 부패와 타락을 방지할 논리를 찾고자 했다.
본고에서는 다산의 대표작 중 두 작품 ‘애절양’과 ‘노인일쾌사’를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며 당대의 현실배경과 그의 시관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2. 정약용의 생애 금장태.『茶山 정약용- 한국실학의 만남』,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9, ,p.28-p.68,

1762년에 태어나서 1836년 75세로 세상을 떠난 다산의 생애는 (가) 소년시절부터 27세까지 초년의 ‘수학기’(修學期), (나) 28세에 벼슬에 처음 나가서부터 정조임금이 세상을 떠나던 39세까지 중년의 ‘사환기’(仕宦期), (다) 40세에 경상도 장기를 거쳐 그해 말에 다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가서 57세에 해배될 때까지 장년의 ‘유배기’(流配期), (라) 58세 이후 고향 마재에서 지내다 75세로 돌아갈 때까지 만년의 ‘해배기’(解配期)의 4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의 한 평생을 돌아보면 유난히 격변과 위기의 여울목이 많았으니, 그가 격심하게 부딪혀 돌아서 가야했던 고비들을 좀 더 세분하여 본다면 아래와 같이 7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서술의 편의를 위해 (나) 사환기의 두 단계와 (다) 유배기의 두 단계를 묶어서 5단계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 수학기
1) ‘소년시절’- 소년시절 지방의 산사(山寺)나 서울에서 독서하던 시기.
다산이 태어나던 영조 38년(1762)은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났던 해이고, 이 사건을 목도하던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내려왔는데, 마침 그때 다산이 태어났다. 그래서 다산의 처음 이름을 귀농(歸農)이라 지었던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재기(才氣)가 넘쳤으며 한시(漢詩)를 짓는데도 부지런하여 10세 이전에 지었던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졌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때 그는 자신의 시집을 『삼미집』(三眉集) 정약용이 두 살때 마마를 앓았는데 순조롭게 치루어 흔적이라고는 오른쪽 눈썹에 약간 남아 눈썹을 세갈래로 나누어 놓아서 그 자신 스스로 삼미자(三眉子)라 호를 지었던 것이다.
이라 제목을 붙였다 한다. 열세살때는 두보(杜甫)의 시를 베껴쓰면서 운(韻)을 따라 수백편을 지었으니, 이처럼 그의 남다른 재주는 일찍부터 드러났던 것이다. 열다섯살 봄에 풍산 홍씨 홍화보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처가가 서울이었으므로 이때부터 다산은 서울을 자주 드나들었고, 마침 부친이 호조좌랑으로 다시 벼슬에 나가자 서울 명례방에 집을 구해 살기 시작하였다. 이무렵 서울에서 그는 누님의 남편인 이승훈과 큰 형의 처남인 이벽과 어울렸고, 당시 문학으로 명성을 날리던 성호(星湖)의 종손 이가환을 만났으며, 당시 이들 성호학맥의 후학들 사이에 성호의 학문을 학습하고 조술하는 학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산은 10세때 서울에 머물면서 이들 성호학맥의 후학들을 따라 성호의 유고(遺稿)를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학문에 뜻을 세웠다 한다. 정약용이 뒷날 제자나 조카들에게 “나의 큰 꿈은 성호를 따라 사숙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이 많았다”()고 말한 사실에서도 소년시절 성호로부터 받은 학문적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2) 서학(西學)과의 만남- 23세때 태학생으로 있을 때 천주교 신앙에 빠져들었던 사건.
다산이 성균관에 입학한 이듬해인 23세때 성호학파에 속하는 기호남인 시파(時派)의 청년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새로 전래한 서학에 관심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당시 성호학파의 청년지식인들 사이에 서학의 수용과 천주교 신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은 바로 큰 형수의 동생인 이벽과 누님의 남편인 이승훈 이었다. 다산이 23세때 4월 성균관 유생으로 서울서 공부하다가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려고 고향에 갔을 때 이벽과 만났고 그의 탁월한 달변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듣고 심취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다산이 30세가 되던 해에 ‘신해진산지변’ 신해진산지변: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으로 국가적으로 강상(綱常)의 중대한 변고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윤지충과 권상연은 처형되었다.
이 일어나 정부는 공식으로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禁敎令)을 내리게 되었고, 서학서적에 대한 금서령(禁書令)이 내려졌다. 진산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그 자신이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함을 분명히 지적했고 그가 27세-29세 사이에 천주교 신앙을 떠났음을 암시했다.
참고문헌
금장태,『茶山 정약용-한국실학의 집대성』,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77
금장태,『실천적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05
宋載邵, 茶山의 에 대하여, 韓國韓文學硏究 Vol.2 No.-, 1977
김성진, 茶山의 硏究, 國語國文學 Vol.21 No.-, 1983
인물자료, 두산대백과
유해춘, , 문학과언어학회, 문학과언어 간행물
송재소, 『몸은 곤궁하나 시는 썩지 않네』, 한길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