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전] 제갈량의 전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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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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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제갈량
2. 제갈량의 일생
3. 제갈공명의 출사표
4. 작품배경
5.작품해설

본문내용
1. 제갈량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이 량(亮)이고 시호는 충무(忠武) 또는 무후(武侯)이다. 전한(前漢) 말 낭야(瑯邪)에서 태어났다. 제갈공명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동생 균을 낳고 얼마 후 제갈공명이 9세 되는 해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도 제갈공명이 1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제갈공명보다 7세 많은 형 제갈근은 계모를 모시고 오나라로 가서 손권의 수하가 되었다. 그러나 제갈공명은 동생 제갈균과 함께 숙부 제갈현(諸葛玄)이 살고 있는 형주로 가서 살았다. 그후 숙부마저 전쟁으로 세상을 떠나자 제갈공명은 하는 수 없이 양양(襄陽) 교외의 융중산(隆中山) 근처에서 초막을 짓고 살면서 밭을 갈고 책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建安 12년(207) 장판교 싸움에서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곤궁한 위치에 놓였을 때 서서와 사마위의 천거로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이다.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의 정성에 감동한 제갈량은 결국 유비를 따라 나서게 되고 유비의 수하에서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를 물리칠 계책을 짜낸 뒤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얻어 근거지로 삼은 다음, 다시 익주(益州)로 쳐들어가 한중(漢中)을 점령한다.
221년 유비가 촉한의 황제에 오른 후 제갈량은 승상이 되었다. 223년 유비가 병들어 죽자, 제갈량은 아들을 부탁한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후주 유선(後主 劉禪)을 극진히 보필하면서 촉한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촉한은 당시 吳나라 정벌에 실패한 후, 남만(南蠻)까지 반란을 일으켜 형세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제갈량은 농업을 장려하고 군사와 법령을 정비하여 상벌을 분명히 하는 등 혼신의 힘을 쏟아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얼마 후 다시 안정을 회복 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그 당시 사실 촉한의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그가 끝까지 유비와의 약속을 지켜 스스로 패권을 쥐지 않고 제2인자로써 묵묵히 유선을 보필한 행동은 훗날 진정으로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행동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후에 제갈량은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러는 도중에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2. 제갈량의 일생
-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제갈공명이 살고 있던 초막은 유비가 수비하던 신야에서 약 75㎞ 떨어진 곳이었는데, 유비는 친히 세 번을 찾아가서야 제갈공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에 유비는 제갈공명에게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계책을 물었다. 제갈공명은 당시의 정세를 상세히 분석한 후, 유비에게 먼저 조조, 손권과 더불어 3국 정립의 국면을 만들고,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성)를 취하여 대외적으로 손권과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대내적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면 충분히 패업(覇業)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제갈공명의 "천하삼분지계"라고 일컫는 헌책이다. 이때가 유비의 나이 47세이고 제갈공명은 27세 때의 일이다. 이 계책을 들은 유비는 무릎을 치고 크게 기뻐하며, 제갈공명을 군사(軍師)로 맞이하여 날로 신뢰를 더해 나갔다. 이러한 유비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불만을 터뜨리자, 어느날 유비는 두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공명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 그러니 그대들도 다시는 말을 하지 말라."
이후 관우와 장비는 더 이상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어원으로, 여기에서 유비가 얼마나 깊이 제갈공명을 믿고 의지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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