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

 1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1
 2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2
 3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3
 4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4
 5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5
 6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6
 7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7
 8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8
 9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9
 10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10
 11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11
 12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12
 13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1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근현대사] 고종 업적평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인물 소개 - 고종

2. 시대적 배경
(1) 고종의 친정 이후 시대적 흐름
(2) 청일전쟁이후 국내외 정세
(3) 일본과 러시아의 움직임

3. 고종의 업적
(1) 대한제국 및 평가
(2) 광무개혁 및 평가
(3) 중립화 정책과 평가

4. 업적 평가

5. 감상 & 의견

본문내용

1. 고종 인물 소개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희(熙)로 개명, 자는 성림(聖臨, 후에 明夫로 고침). 호는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1852년 7월 25일 정선방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이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 조대비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고종은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으로 국정을 총람, 대신 섭정하였다. 그 뒤 고종은 장성하게 되면서 직접 통치를 하려는 강한 의욕을 가지게 되면서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민비와 노대신들은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폈다.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다스린다는 서무친재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을 환수하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였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민씨 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과는 달리, 대외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국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구미 열강과도 조약을 맺는 등 적극적으로 개항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고종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1898년 7월 안경수는 현역과 퇴역 군인들을 동원한 황제 양위를 음모하였다. 또, 9월에는 정계를 농락하다 유배된 김홍륙이 독다사건을 일으키는 등 고종 신상에 거듭 위험이 닥쳤으나 무사하였다.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맹렬하게 개최되고 자유민권운동이 확산되어가자,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였다. 고종은 1900년 둘째 아들을 의친왕, 셋째 아들을 영친왕에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황제 폐립을 음모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압력 하에 한일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 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1905년 11월 26일자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청국 즈푸를 경유하여 전 미국 공사이며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내어 미국 정부에 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체결한 뒤였기 때문에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 국정에 전반적으로 간여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마침내 한국 문제를 국제 정치의 마당에 호소하고자 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파견하였다.
한편,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들 특사 활동에 원조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송병준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 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 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 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홍릉이며, 저서로는 주연집이 있다. 한민족 문화대백과사전 (www.encykorea.com)



2. 시대적 배경

(1) 고종의 친정 이후 시대적 흐름
고종과 민씨 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의 항구를 개항하여 개화 문명을 수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개화 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 간의 대립이 점차 첨예화되어 갔다. 그러던 중 1881년 황쭌셴의 조선책략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을 일으키는 등 민씨 정부규탄의 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 때 안기영 등은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고 하는 국왕폐립음모가 일어났다. 그러나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면서 고종은 안전할
참고문헌
왕현종, 민족적 관점에서의 한국 근대정치사 비판과 ‘고종’의 절대화, 2003
하원호, 고종 (구국의 ‘우리 황제’인가? 망국의 인물인가?), 2005
김윤희, 고종황제는 황실 재산을 왜 만들었나, 2005
현광호, 열강에 의존한 중립화의 한계, 러일 전쟁과 고종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