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정치] 프 로 이 센 절 대 주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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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정치] 프 로 이 센 절 대 주 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Ⅰ. 서 론12 -


Ⅱ. 본 론
1. 프로이센 절대주의의 성립
1) 외부적 배경
2) 경제적 배경
3) 농민반란과 봉사관계의 출현

2. 프로이센 절대주의의 발전
1) 계몽군주의 출현
2) 프로이센의 강대국화
3) 나폴레옹 전쟁과 융커계급의 변화
4) 빈체제 이후

3. 프로이센 절대주의의 특성
1) 프로이센의 관료제의 귀족성
2) 융커계급의 두 가지 특성

Ⅲ. 결 론




본문내용
Ⅰ. 서 론12 -

1871년 프로이센의 주도 아래 독일 통일이 성취되고, 급속하게 산업화하면서 세기 전환기에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자, 유럽의 세력균형은 흔들리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사회 내부의 사회경제․정치․문화적 지형은 팽팽한 긴장으로 얼룩져 있었다. 예컨대 급속히 산업화되고 있지만 지배집단은 여전히 전산업적인 국가 체제 내부로 노동 대중을 안정적으로 통합시키는 문제 같은, 결정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후 프로이센 주도의 제 2제국의 뒤를 이은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의회주의 체제로도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자, 대내적으로 긴장을 해결하기 위한 보다 과격한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나치의 선동적 대중운동이 인민을 통합하면서도 엘리트에 의해 조작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엘리트들은 권좌에서 내려와 권력을 히틀러와 나치 당에게 이양했던 것이다. 독일의 비극은, 나치에게 권력을 이양하자 기존의 긴장이 오히려 나선형적으로 과격화되고 종래에는 치명적인 결과만을 빚었다는 것이다.
서구의 절대주의 국가는 봉건적 공납의 금납화를 받아들인 봉건계급의 재편된 정치적 기구였다. 그것은 점차 도시화되어가는 경제 속에서 일어난 농노제의 소멸에 대한 보상이었다. 반대로 동구의 절대주의 국가는 가난한 민주들이 누렸던 전통저긴 공동체의 자유들을 이제 막 일소해버린 봉건계급의 억압기구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도시생활과 저항이 일소된 상황 속에서 농노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장치였다. 동구에서의 영주반동은 새로운 세계가 위로부터의 강제에 의해서 창출되어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구의 절대주의 국가는 이 원경험의 흔적을 한번도 상실하지 않았다.
18세기에 형성된 프로이센의 절대주의의 결과로 보수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근대 프로이센-독일의 독특하고 특출한 사회를 낳았다. 절대주의는 프로이센을 강대국가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열할을 하기는 했으나 그 사회는 서구유럽의 자유주의적 사회와는 궤도를 달리하는 사회였다. 따라서 보수주의적이고 억압적인 프로이센-독일의 사회적 특성의 기원을 18세기에 형성된 프로이센의 절대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프로이센에서 귀족계급의 장원반동은 17세기 절대주의 국가의 확립에도 앞서는 16세기의 재판 농노제‘구츠헤어샤프트’ 구츠헤어샤프트(Gutsherrschaft) : 농민의 인신적 예속에 기초한 동부 독일의 영주제. 페리 앤더슨, 김현일외 역,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1997, p.232.
의 확산을 통해서 많은 농민들을 압도하였다. 생산에서의 예속적 관계가 소유권과 통치권, 영주권과 토지소유권의 직접적인 융합을 내포하였기 때문에 동구에서의 영주반동 이후에 엘베 강 동쪽의 애초에 존재하였던 분권적 귀족국가는 당연한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동구와 서구간의 수출입 무역을 통한 경제적 연계에 핵심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오류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봉건적 생산양식이 통일적인 국제경제 체제를 창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선진국들로부터 발전하여 후진국의 발전을 제약하고 지배한 산업자본주의 세계시장만이 통일적인 국제경제 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농노제 소멸이후의 어중간하게 상업화된 봉건적 농업 16, 17세기에 서유럽 여러 지역 농업의 화폐화를 나타내는 실질적인 지표는 아마도 우리가 종종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낮았을 것이다. 장 뫼브레는 16세기 프랑스에서 “농민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가내적 준자급체제 속에서 살았고” 동시에 “프티 부르주아를 포함한 장인들의 일상생활도 사실상 동일한 원리, 즉 무엇보다, 그들이소유하고 있는 땅에서 경작한 식량으로 살았으며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것을 사고파는 그러한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었다.”고 말한다. “일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금화나 심지어는 은화의 사용도 결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수의 불가결한 교환거래는 화폐 없이도 할 수가 있었다. 앞의 책, p. 258.
과 고도와 같은 상공업 자본을 결합시킨 이행기의 혼성적인 서유럽 경제들은 그러한 강제적인 견인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구에 대한 서구의 영향이 동구에서 출현한 국가구조에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봉건제 내에서 국가 상호간의 작용은 경제적인 차원이 아니라 항상 정치적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봉건제가 경제외적 강제에 기반을 둔 생산양식이기 때문이다. 즉 봉건제에서는 상업이 아니라 정복이 일차적인 팽창의 형태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몇 세기 동안 동구와 서구간의 주요 매개는 군사적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