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사] 조선의용군과 민족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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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운동사] 조선의용군과 민족항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의용군의 탄생에서 해체까지
(1)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건립과 화북지대(華北支隊)의 설치
(2) 조선의용군으로의 개칭과 해방 이전의 항일투쟁
(3) 해방 이후의 만주 진입과 조선의용군의 해체
3. 화북지방 노대농장과 독립운동
(1) 노대농장(蘆臺農場)의 설립배경
(2) 노대농장의 설립과 운영
(3) 노대농장과 조선의용군
4.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
(1) 비교 의의
(2) 인적 구성 및 활동 성향
(3) 상호 인식
(4) 對中 자주성 문제
본문내용
1. 머리말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무장독립투쟁은 1921년 자유시참변을 계기로 그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후 독립운동 지사들은 일부는 소련으로, 일부는 중국 내부로 들어가는 등 뿔뿔이 흩어져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에 청(淸)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愛新覺羅溥儀)를 내세워 괴뢰 정부인 만주국을 세운 후, 1937년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에 선전포고, 대대적인 중국 공격에 나서게 된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내전을 멈추고 결사항전을 선언하면서, 8년간의 중·일 전쟁(中․日 戰爭)이 막을 열게 된다. 중·일 전쟁의 개막은 중국 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그동안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해 중국 관내에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반대했던 중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항일을 선언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조선의용군의 등장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열망과 노력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본 발표문에서는 조선의용군의 창설에서부터 해체까지를 통해 1930년대 이후에서 해방 전까지의 무장독립투쟁의 양상을 살펴보고, 여러 독립운동들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조선의용군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 재고찰해보고자 한다.


2. 조선의용군의 탄생에서 해체까지

(1)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건립과 화북지대(華北支隊)의 설치

중·일전쟁의 발발은 재중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을 의미했다. 중국 역시 일본과의 싸움에서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항하는 국가들과의 연합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새로운 단체의 구성을 통해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서려 했다.
1937년 말,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과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은 공동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이하 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아울러 조선인 청년 83명을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에 입교시켜 특별훈련을 받게 했다. 이 인원들을 통해 민족전선연맹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게 되고, 이 인원들이 훗날 조선의용군의 주축이 된다.
이 후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김구(金九, 1876-1949)가 중국 정부와 계속 협상을 하고, 국제적인 반파시스트 단체와의 연합이 결실을 맺어, 중국 정부로부터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창설을 허가받게 된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건립안을 올린 것은 일본 공산주의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였다. 이외에도 중국인 나청(羅靑) 등의 외부 인사들이 조선의용대 건립에 도움을 주었다. 건립 이후에도 조선의용군은 국제적인 반파시스트 단체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상도, 「조선의용군과 일본인 반전운동집단의 관계」,『한국근현대사 연구-제42집』, 2007, 33쪽.
김원봉 등의 조선인들은 처음부터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자 했으나, 중국 국민당의 반대로 군대로서의 성격이 약한 ‘의용대(義勇隊)’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중국 정부에서는 인원이 적다는 이유를 들어 ‘의용군’이라는 명칭의 사용에 부정적이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직접적인 무장투쟁이 아닌 정치선전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에 ‘의용대’의 명칭을 사용하길 원했다.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나남출판사, 2001, 73~74쪽.

초기의 조선의용대는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부대가 아닌 무장정치선전을 주목적으로 하는 부대였다. 이는 초기 인원수도 100명 정도에 불과해 전투부대의 역할을 맡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따라서 초기 단계에 있어서 인원을 늘리고 단체를 홍보하는 일에 역량을 집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 조선의용군의 활동은 화북으로 이동하고,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당시 중국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서 창설하였으나, 일본의 침공이 거세짐에 따라 점차 계림(桂林), 중경(重慶)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전선이 넓어 항일역량을 집중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조선의용대 수뇌부는 무장항전을 전제로 화북 지방으로의 이동을 모색하게 된다. 또한 중·일 전쟁을 계기로 이루어졌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결렬되면서, 조선의용대의 입지가 좁아졌다. 국민당의 반공노선이 강화되고, 항일의지가 약화되자, 강력한 항일투쟁을 원했던 조선의용대와는 계속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 당시 화북 일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아 조직원을 모으는 데에도 유리했고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가 1941년 1월 10일 결성되어 팔로군과 함께 활동을 하고 있었다. 회장은 무정(武亭), 조선의용대의 인원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염인호, 앞의 책, 87쪽.
, 중국 공산당도 근거지를 이 일대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용대는 대부분의 전력을 화북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1940년 말에서 1941년 여름에 걸쳐 최창익(崔昌益, 1896-1957?)을 중심으로 섬서성(陝西省) 일대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이동하기에 이른다. 이 후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설치하고, 무장선전·간부양성·적구(敵區)조직공작 적구(敵區)란 일본군이 완전히 점령하여 팔로군이나 의용대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을 말한다.
을 3대 노선으로 삼아 항일전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기관지 발간을 통해 자신들을 홍보하는 데에도 힘썼다. 김희곤, 「朝鮮義勇隊의 기관지 발간과 그를 통해 본 對敵工作」,『사학지-제31호』, 1998, 509-533쪽.
이전까지는 민족전선연맹의 산하단체로 있었으나, 화북 일대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의 산하단체로 바뀌게 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이 후 1942년에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확대·개편하기 전까지 1년 동안 무장정치선전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을 지속해나간다. 이 와중에 팔로군과 함께 10여 차례 교전하고 조선의용대 단독으로 두 차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 중의 하나인 호가장 전투(胡家庄戰鬪)는 1941년 12월 12일 무장선전활동 도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한 차례 전투를 벌여 4명이 전사하고, 3명이 중상을 입고, 1명이 체포당하는 피해를 입고 끝난 전투였다. 이 후에 읍성(邑城)에서 한 차례 교전이 있었는데, 읍성전투 역시 무장선전 도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벌어진 전투로, 1명만 경상을 입는 경미한 피해를 입고 끝났다.
조선의용대와 팔로군의 선전활동이 더욱 강화되자 불안감을 느낀 일본군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와 팔로군의 근거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반소탕전(反掃蕩戰)에서 팔로군과 조선의용대는 합심하여 10여 명이 전사했지만 그 세력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김희곤, 「朝鮮義勇隊의 기관지 발간과 그를 통해 본 對敵工作」,『사학지-제31호』, 1998, 530쪽.

일련의 활동으로 통해 조선의용대와 팔로군의 연합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조선인의 발언권 역시 강해졌다. 또한 일본군 역시 조선의용대를 위험요소로 여기게 할 만큼, 그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호가장 전투나 반소탕전 등의 전투들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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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진, 『항일무장 독립투쟁사 2』, 도서출판 일원, 2000.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나남출판사, 2001.
윤영식, 『불멸의 민족혼』, 윤세주·이원대열사기념사업회, 2003.
한상도, 『중국혁명 속의 한국독립운동』, 집문당, 2004.
한상수, 『독립운동 유적지 문견록』, 문음사, 1998.

김광재,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사학연구-제84호』, 2006.
김광재, 「중일전쟁기 중국 화북지방의 한인이주와 '蘆臺農場'」,『한국근현대사 연구-제11집』,1999.
김희곤, 「朝鮮義勇隊의 기관지 발간과 그를 통해 본 對敵工作」,『사학지-제31호』, 1998.
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진입 구상」, 『한국근현대사 연구-제21집』, 2002.
한상도, 「조선의용군과 일본인 반전운동집단의 관계」,『한국근현대사 연구-제42집』,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