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

 1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
 2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2
 3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3
 4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4
 5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5
 6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6
 7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7
 8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8
 9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9
 10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0
 11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1
 12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2
 13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3
 14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4
 15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5
 16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6
 17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7
 18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8
 19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19
 20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경제] [경제] 경제개발. 수출지향적공업화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제2편 한국공업화과정의 전략적인 특징
제1장 공업화 과정
1. 개발계획의 실시
한국은 60년대에 들어와 커다란 변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해방후 한국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일본과 달리 재정금융의 관제고지만을 장악하는 간접지배방식을 위하여 화페수량설에 기초한 금융정책 등에 의한 명목적 안정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속자본의 성장을 위한 좋은 토양을 조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예속자본은 귀재불하 관료와의 결탁으로 생산수단을 취득하고 이에 의해 실수요자용 외화의 우선 할당을 배타적으로 분배받았으며 이외에 은행융자나 재정자금의 배타적 이용을 통하여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공업화는 소비재공업에 집중되었는데 미국이 이러한 부문에 중점을 두고 정책을 수행한 것은 대중 소비재공업의 안정에 의한 인플레의 저지라는 기본정책과도 연관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잉여농산물의 처리를 위한 종속경제기구의 창출이라는 의도에서였다.
본문내용
그러나 미국은 자국제품과 경쟁하는 중화학공업의 발달에 대해서는 극히 억제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국내사정으로 인하여 58년부터 원조가 감소하면서 독점재벌의 이윤추구, 확대재생산의 방식이 하나의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예를들어 면방직업에서 생산고가 1958년 이후 거의 증가하지 않고 방적부문은 설비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매년 절대적으로 감퇴하였다. 그리고 조업률의 감소와 함께 이윤율도 급격히 하락하였다. 예를들어 면사생산 순이익률이 1950년대 초에는 100-200%, 1954년에는 50% 이상에 달하다가 1960년에는 5%, 1961년에는 3.8%로 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황은 첫째로 국내시장의 절대적인 협소와 대중의 빈곤에 의한 유효수요의 부족때문에 일찍 설비과잉과 생산과잉에 부딪친 것, 둘째로 미국의 원조달러에 의해 원료를 도입하고 있었던 것에서 생겨난 문제, 예를들어 원조물자의 값비싼 판매, 원조의 감소, 디플레 정책의 강요 등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의 독점재벌은 이러한 벽을 돌파하기 위해 몇가지 방법을 모색하였다. 1)중화학공업부문에의 진출 2)기존부문제품의 수출증대 등이 그 방법으로 고려되었다. 한국의 독점재벌은 중화학공업부문에의 진출에 의해 그들 제품이 부당하게 비싼 원료수입을 통하여 빼앗기고 있던 독점이윤을 자기수준에 장악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설비를 수입하기 위한 외자를 획득하기 위해서도 수출증진을 부르짖게 되었다. 그 방법으로 그들은 선진자본주의국의 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그 밑에서 점차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한다는 외자도입의 방향을 택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독점재벌은 선진자본주의국에게 자본적, 기술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중공업화를 억제하려고 하는 자본주의국의 요구대로 안정정책을 취하고 있다가는 점차 빈곤해진다고 하는 상태가 예측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속적이면서 민족적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독점재벌의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50년대 말 부터 불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불황을 타개하고 원조감소에 따른 경제안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경제계획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특히 원조의 감소와 유상차관으로의 전환과정에서 유상자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원리금을 무사히 갚도록 「경제의 계획화」와 같은 것을 추진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는 외국자본의 도입 그 자체를 원활히 하기 위한 법령,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58년 봄에 당시의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란 계획기구를 설치,원조자금의 효율적인 사용에 목적을 둔 「경제개발3개년계획」이란 중기경제계획을 마련한 바 있으며 또 후자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1960년 1월 「외자도입촉진법」을 제정함과 동시에 「한-미간의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경제원리를 신봉한 이승만정권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부응하지 못하였고 민주당정권도 경제제일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앞서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만든 「3개년계획(안)」을 발전시켜 「제1차5개년계획(안)」을 편성만 하였을 뿐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하였다. 이제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흐름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2. 60년대의 공업화-수출지향적공업화의 정립
박정권은 피폐한 경제재건을 제1의 과제로 삼았다. 박정권은 개발계획의 실시 이전에 단기 대책으로서 농어촌진흥을 위한 시책(농어촌고리채정리, 농산물가격유지법공포, 농협과 농업은행의 통합, 수리조합의 합병 등), 긴급실업대책(도시토목사업, 개간에 의한 귀농정착사업), 위축한 기업활동의 촉진(경제활동의 자유로운 분위기 조성, 재정금융의 원활화), 국제수지의 개선(보세가공무역의 촉진, 수출장려교부금의 교부, 수출조합법의 제정, 수입의 강력한 규제와 밀수의 취체), 단일환율제의 채용 등이 취해졌다.
이와 함께 재정운용의 개혁(세제개혁, 예산제도의 개혁, 조달업무의 일원화, 국토건설사업의 일원화), 금융제도의 정비·강화(중소기업은행의 설립, 산업은행법의 개정,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의 공포, 한국은행법의 개정 등을 행하고 정부는 금융기관의 인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과감한 개발금융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듬) 등을 행하였다.

A.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66)
제1차계획은 그 목표로 1)사회경제적 악순환의 시정 2)자립경제 기반의 구축을 들고 이를 위한 주요 정책 과제로 1)에너지 공급원의 확보 2)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의 시정 3)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4)유휴자원의 활용 5)국제수지의 개선 6)기술의 진흥을 들고 있다.
제1차계획은 59년에 작성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모체로 하여 입안되고 실시된 것이었다.이는 원조의존형경제에서 탈피하여 국민의 생활의 개선을 목표로 표방하였고 농어촌고리채정리를 추진하였다.이는 수입대체공업화를 행함과 동시에 사회자본의 확충농업개발의 진흥 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 계획의 지탱에 필요한 국내저축을 바랄 수가 없어서 적극적인 외자도입이 시도되었다.정부는 외자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국내법을 정비하는 등 구미제국에서의 자금도입에 힘을 기울였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그 위에 62년에 행해진 통화개혁에 수반하는 혼란도 덧붙여져 계획은 2년차에 벽에 부딪치고 3년(64년의 수정계획)부터는 목표를 약간 하향수정한 계획으로 이행했다.
계획의 무리가 생긴 것은 무엇보다 국제수지의 위기이다. 미국의 대한원조의 감소 등으로 외자도입이 계획을 하회하고 개발계획의 진행으로 수입수요가 급증하여 63년, 64년 외화보유고가 급감하고 국제수지위기가 초래되었다. 그 때문에 적극적인 수출진흥과 외자도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농업부문의 고용흡수력이 낮았다. 제1차계획에서의 고용상황을 보면 고용증가율은 4.7%로 책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은 3.2%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농업진흥책은 시급을 요하는 실업문제의 해결에 대처할 수 없으므로 노동집약적인 수출산업의 육성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정부는 개발전략 그 자체에 크다란 변경을 가하게 되었다. 정부는 계획기간 중 금리인상, 환율조정, 개방경제체제로의 전환 등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 수행의 과정에서 수출입링크제도의 강화,수출금융금리의 인하,한국무역진흥공사의 설치 등이 행해지고 수출지향에의 경사가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