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 둔황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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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문화] 둔황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둔황의 찬란했던 어제


Ⅱ. 둔황의 힘겨운 오늘과의 싸움
1. 환경의 피해와 극복노력
2. 문헌의 유출
1) 유출 경로
2) 각국의 협력(IDP)와 우리나라


Ⅲ. 둔황의 밝은 내일
본문내용
Ⅰ. 둔황의 찬란했던 어제

둔황[敦煌, Dūnhuáng, 둔황]은 감숙성 주취안지구(酒泉地區) 허시저우랑(河西走廊)의 서쪽 끝, 당강(黨河) 유역 사막지대에 있는 인구 11만 정도의 오아시스 도시이다. 기원전 117년 한 무제(漢武帝)가 둔황을 서역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아 군사를 배치하고,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설치하면서 발달하게 되었다.
둔황은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남쪽 길과 북쪽 길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 및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끊임없이 사절을 교환했고, 민간인들의 왕래 또한 빈번했다. 사신과 민간인의 잦은 왕래는 문물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는 구법승(求法僧)들이 경전을 구하러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갔고, 많은 인도 승려들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당대(唐代)에 불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현장(玄奘)의 역경(易經)사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유교·도교와 함께 중국의 3대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것은 인도와 중국을 연결시켜준 실크로드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실크로드는 상업적 교류 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에는 둔황이 있었고, 시대의 흥망을 함께 했다.
둔황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둔황의 막고굴(莫高窟)이다. 막고굴은 둔황에서 남동쪽으로 25㎞ 떨어져 있으며, 명사산과 동쪽의 산웨이산(三危山)과 교차하는 부분에 펼쳐진 약 1.8㎞에 달하는 절벽에 만들어졌다. 약 1,000여 개에 달하는 굴을 가지고 있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렸다. 동진(東晋) 건원 2년에 둔황에서 머물던 낙준이라는 승려가 사방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석굴 사원을 조성한 것을 시작으로,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과 원(元)까지 이어지는 천 년의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하지만 12세기 이후 실크로드가 쇠퇴하면서 둔황 지역은 영향력을 상실했고, 막고굴도 역사 속으로 점차 사라져갔다.
그 후, 긴 세월을 흐르는 동안 자연 붕괴와 인간들의 파괴, 약탈로 인해 현재는 약 492개의 동굴만이 남아 있다. 막고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물은 소상(塑像)과 벽화(壁畵)이다. 유물의 내용은 초기의 작품은 민간 신화와 관련된 것이 많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된 후에는 불교예술이 주를 이루게 된다. 각 굴마다 들어서 있는 소상들의 표정과 자세에는 각 시대별 특색이 그대로 드러나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불상의 형태와 벽화의 내용이 굴마다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동굴 벽에 그려진 정밀하고 기하학적인 무늬의 벽화와 천정화는 화려한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 준다. 그 중에서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제17굴은 송나라 때까지의 경전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서하(西夏)의 지배에 있을 때 봉쇄되었다가 1900년에 다시 발견되어 막고굴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신호탄 되었다. 막고굴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Ⅱ. 둔황의 힘겨운 오늘과의 싸움

1. 환경의 피해와 극복노력
과거 둔황이 크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지하수를 보유하고 있는 오아시스 덕택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적 변화로 인해, 수목이 말라죽고 대지가 건조해지는 사막화 현상이 둔황 일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둔황 지역의 수원은 치롄(祁連)산의 당(黨)강과 치롄산 서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난(南)산과 수거난(疏勒南)산 사이를 흐르는 수거(疏勒)강이다. 이들 두 수원의 상류지역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이 생활용수와 관개용수 확보를 위해 상류지역의 수자원을 무분별하게 이용하였고, 강을 흐르는 물의 양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 때문에 강의 하류에 위치한 둔황시는 수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매년 4천1백만㎥에 달하는 지하수를 사용하게 되었고, 둔황시의 지하수 수위는 연평균 43㎝ 씩 낮아지고 있다. 지하수 수위가 하강하자 둔황지역의 방풍림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되었고, 지반도 약해지고 있다. 바람과 함께 날아 온 모래들로 인해 진행되는 사막화 또한 심각하다. 신중국 건국 초기 4억4천20만 평에 달하던 둔황의 천연림 지역은 현재 2억7천300만 평으로 감소했고, 8천840만 평에 달하던 버드나무 숲은 2천900만 평으로 줄었다. 나무와 습지가 줄어들면서 둔황 지역의 사막면적은 매년 402만 평씩 증가하고 있다.
둔황지역의 사막화는 주민들의 생활터전과 ‘둔황의 눈동자’라고 불리는 월아천(月牙泉)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월아천은 둔황시 명사산(鳴沙山) 아래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로 천 년 넘게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신비의 샘물이다. 하지만 최근 개발과 인구증가로 인해 물 사용이 증가해 월아천의 수원지인 당하와 물길이 끊겼다. 주취엔시 수리수전국 통계에 의하면 45년간 월아천 최대수심은 6.5m가 하강해 2005년에는 1m 안팎으로 떨어져 고갈 될 위기에 처해있다.
년도
1960년
1986년
2005년
월아천 최대수심
7.5m
4.2m
1m
월아천 면적
22.3
13.3
8.3

참고문헌

* 마쓰오카 유즈루, 박세욱 역, 『둔황이야기』, 연암서가, 2008.
* 이강원, 『사막중국(아연중국연구총서09)』, 폴리테이아, 2007.
* 전인초, 『돈황: 실크로드의 관문』, 살림출판사, 2006.
* 정병윤, 『돈황의 전설』, 문자향, 2006.


* 국제둔황프로젝트 홈페이지(http://idp.bl.uk/)
* 위키백과 (zh.wikipedia.org/ ko.wikipedia.org)
* 바이두 백과(baike.baidu.com)
* 네이버백과사전(http://100.naver.com)
* 중국환경산업정보망 홈페이지(www.eischina.or.kr)
* 인민일보 환경부문 홈페이지(http://env.people.com.cn)
* 중국 환보망 홈페이지(http://www.ep.net.cn)
* 주한 중국문화원 홈페이지(http://www.cccseoul.org)
* 한중문화우호협회 홈페이지(http://www.kcfriend.co.kr/)
* 둔황시 홈페이지(http://www.dunhuang.gov.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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