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유적답사

 1  백제 문화유적답사-1
 2  백제 문화유적답사-2
 3  백제 문화유적답사-3
 4  백제 문화유적답사-4
 5  백제 문화유적답사-5
 6  백제 문화유적답사-6
 7  백제 문화유적답사-7
 8  백제 문화유적답사-8
 9  백제 문화유적답사-9
 10  백제 문화유적답사-10
 11  백제 문화유적답사-11
 12  백제 문화유적답사-12
 13  백제 문화유적답사-13
 14  백제 문화유적답사-14
 15  백제 문화유적답사-15
 16  백제 문화유적답사-16
 17  백제 문화유적답사-17
 18  백제 문화유적답사-18
 19  백제 문화유적답사-19
 20  백제 문화유적답사-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백제 문화유적답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시작하기 전에

2. 웅진에서 사비로

3. 진혼(鎭魂) - 능산리 고분군

4. 백제는 금동대향로다

5. 당, 백제, 왜

6. 낙화암에서

7. 끝, 새로운 시작


본문내용
1. 시작하기 전에


출발

두 번의 사전모임, 치열한 답사지 선정, 철저한 사전조사 끝에 2009년 4월 18일, 드디어 우리 9조는 부여로 떠난다. 답사지 선정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사전조사에서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난 뒤여서 인지, 답사에 대한 큰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다.

답사지 선정문제와 사전조사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중에서 어디로 방향을 정해야 할지가 문제였다. 고구려는 우선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리고 가야. 가야 역시 매력적인 후보지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가야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고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으로 다룰 만한 사건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었다.
신라와 백제, 승자와 패자가 대립했다. 우리는 승자가 아닌 패자에게 찾아가기로 했다. 왜 졌는지, 따지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화려한 문화와 뛰어난 외교와 기술을 자랑하던 나라가 왜 후발주자 신라에게 지고 말았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우리는 그렇게 백제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을 확인하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부여가 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제와 답사지가 정해지고, 사전조사에 들어갔다. 사전 조사 역시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방대한 자료들을 하나의 주제 안에 통합시키는 일이 어려웠다. 하지만 답사를 다녀오고 나면 모든 것이 선명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는 부여로 떠난다.

2. 웅진에서 사비로

백제의 사비천도는 서기 538년의 일이고 천도를 단행한 왕은 26대 성왕으로 사비천도는 그의 재위 16년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물론 천도와 관련된 내용이 「삼국사기」 등의 문헌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지만 국호를 남부여로 달리 부르듯이 커다란 사건임이 분명하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것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환경과는 또 다른 배경에서 이룩되었으리라 판단하는 데 문제가 없다. 즉 백제의 사비 천도는 국력신장을 바탕으로 이룩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백제의 사비 천도는 웅진시대에 축적된 국력, 특히 혼란스런 정국을 수습하고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 통제력이 완비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실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였고, 따라서 국가의 정체는 한성 도읍기의 환경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고구려의 침략이란 국가적 위기는 국력의 상당한 저하를 가져왔고, 그러한 환경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것은 백제로서는 최대의 국가적 위기였다.
더욱이 웅진으로의 천도가 왕실에 의한 자발적 행위가 아니라 그보다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위기에 처한 국왕과 도성을 구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한성으로 집결하였던 지방 세력에 의한 것이기에 백제 왕실의 권위 실추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웅진 천도 후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 귀족세력의 전횡이나 구 귀족들의 반발을 효과적으로 무마하지 못하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웅진도읍기 무령왕의 위업을 물려받은 성왕은 이제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국왕을 중심으로 권력기반을 강화하면서 강력한 통치질서를 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증거가 사비천도라고 판단된다. 즉, 백제는 탄탄한 국력을 바탕으로 사비시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한발 나아가 대외적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발전은 선봉에 성왕과 같은 군주가 존재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은 왜 사비로 천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