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국어 - 조선시대의 시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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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양] 국어 - 조선시대의 시가문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1
Ⅱ. 朝鮮前期의 詩歌文學․․․․․․․․․․․․․2
Ⅲ. 朝鮮後期의 詩歌文學․․․․․․․․․․․․․3
Ⅳ. 나오는 말․․․․․․․․․․․․․․․․․․6
※ 參考文獻․․․․․․․․․․․․․․․․․․6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 제정 이후 갑오경장(1894)까지의 약 450년간의 문학을 근세문학이라고 보는데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분수령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여기서의 시대개관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27왕 500년간의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한 후 국초 약 30년간 즉 太祖, 正宗, 太宗의 3대는 전혀 혁명에 의해 민심을 수습케하고자 하는 시기였으니 사병의 철폐, 사전의 관수, 신규전제의 확립, 사유전의 국유화 사찰수의 대폭적 감축, 승려의 淘汰 등 전조의 모든 폐정을 개정하였다. 그 동안 국민의 신앙을 지배해 왔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정도전 일파의 억불론이 시의대로 시행됨에 미쳐, 승려를 八賤에 넣어 대우하고, 승려와 사찰을 제한하였으므로 불교의 세력은 졸지에 좌절되었고 조선시대는 유교로써 國是를 삼아 정치조직․사회제도․국민생활은 오로지 이것으로 통일하여 버렸다.
이처럼 척불정책으로 나가게 된 것은 새로운 정책을 써서 민심을 수교할 의도도 있었지만 불교 자체로는 고려말의 부패한 승려계급들의 정치상․사회상 끼친 바 폐해가 막대함을 직접 目睹한 이태조가 이것으로는 도저히 국가와 백성을 수호하여 나아가지 못할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서다.불교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반면에 숭유의 정책을 써서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 등 교육기관을 세워 그 기능을 발휘하게 함에 따라 주자학(성리학)은 바야흐로 사상계 및 교육계를 통일하게 되니 文運이 융성의 一路를 걷게 되고 불교는 衰滅되어 유교 특히 주자학의 독점무대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는 믿음이 아니고 이론이었기 때문에 유학이 오로지 성해 가는 이면에는 자기를 批判하고 自我를 覺醒할 수도 있었다. 자아에 눈이 뜨여 자기의 고유문화를 찾으려는 氣運이 濃厚하였으니 이것은 國學精神의 맹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있어 국문학사상 가장 잊어서는 안될 것이 훈민정음의 創制이다. 이것은 물론 세종대왕의 영명하고 거룩한 성심과 先見之明에서 우러난 사실이라고도 하겠지만 또하나는 비로소 국학정신에 눈이 뜨이기 시작한 시대적 조류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Ⅱ. 朝鮮前期의 詩歌文學
歷史的으로 볼 때 가장 뛰어난 임금 가운데 한 사람인 세종대왕은 신하 신숙주, 성삼문 등을 중국의 음학자 황찬에게 여러번 보내는 등 수년 여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훈민정음 28자를 15세기 중엽에 완성하여 반포하였다. 이것은 우리 歷史上 최초로 고유문자에 의한 文字生活이 가능하게 되었고 한글문화의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는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원나라가 滅亡하고 명나라가 일어나 신흥의 기운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발명되었던 시기이다. 이렇게 동서양이 같은 시기에 文藝復興 運動을 동시에 전개했던 사실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든 즉시 頒布한 것이 아니라 그 實效性을 알아보기 위해 그것을 활용한 이른바 악장문학의 대표적인 ‘용비어천가’를 짓도록 하였고 자신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어내기도 했다. 여기에는 훈민정음의 시험 사용이라는 목적 외에도 조선왕조 성립의 正當性과 그 조상의 신성화 등을 확고히 하려는 뜻과 佛陀의 은덕을 기원하는 뜻이 內包되어 있다.이렇게 하여 성립된 악장문학은 개국 초기에 지어졌던 정도전의 ‘신도가’, ‘문덕곡’ 등에 배하여 훨씬 정제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한동안 왕궁을 중심으로 귀족 사이에 널리 불리어졌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고려 때 발생하여 이때까지 존속되던 경기체가와 함께 차츰 그 세력이 弱化되더니 결국 消滅하고 말았다. 이유는 문학 형태가 대체로 厚有階層이 양반 귀족계급에 국한하였으며 내용의 擧皆가 조선 개국과 관련하여 그 찬양이나 왕업의 영원무궁함을 기원하는 것이었는데 왕권의 안정에 따라 그럴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 점 그리고 당시의 문학 형태인 時調와 歌辭가 워낙 사람들의 人氣를 독차지하고 있던 상태여서 이 문학은 별로 돌아보지 않게 된 점으로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言及할 것은 이 시대 문학의 寵兒라 할 만한 時調와 歌辭다. 이 시가들은 우리 민족의 性情에 워낙 잘 맞아서 20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대체로 이 시형들은 그 完成된 시기를 여말조초로 보는데 그렇다면 약 600년 동안 그 생명이 유지되어 오고 있는 셈이다. 세계문학사상 이러한 生命力은 보기 드문 일이라 하겠다.
이들 시가가 이러한 생명력을 갖게 되기까지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이들은 노래로 불리어질 때 그 유장한 리듬(4음보격)이 우리 민족의 呼吸에 자연스럽게 합치된다는 점이며, 둘째, 表現技巧가 유학자들의 미의식에 적합하도록 構成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시조는 한시의 絶句처럼 비교적 간결하면서 특유의 律格을 지켜 가는 데서 소박간결한 것을 즐겨하고 점잖음과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계급의 性情에 꼭 맞았다는 것이고 가사는 4음보 4보격의 무한연속체로 길게 이어지는 辭說에서 설득적인 목소리로 유교사상을 담기에 적합한 그릇이라는 점이다.
시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抒情이나 敍景 혹은 애정생활 등 다양한 세계를 그리고 있는데 이 중에서 압도적 다수가 유교적 忠義思想을 기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여말조초의 회고가나 송축가 및 사육신의 절의가 등은 물론이고 비록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서경시라 할지라도 그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모두 聖恩 때문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忠義槪念에 歸結시켰던 것이다. 간혹 순수한 敍情詩나 妓女에 의한 애정시가 있었지만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 작품은 최근에야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새 작품이 발견될 수 있다는 可能性을 보여주는 현상으로서 매우 注目을 요하는 일이라 하겠다. 이제 이들 詩歌文學을 주도했던 주요 작가들을 들어보면 이조년, 길재, 정몽주, 변계량, 이황, 이이, 정극인, 정철, 박인로, 송순, 양사인 등이다.
참고문헌
※ 參 考 文 獻
1.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서울 : 신구문화사, 1978.
2. 장덕순, 『한국문학사』, 서울 : 동화문화사, 1978.
3. 김동욱 『국문학사』, 서울 : 일신사,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