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국어 - 혜성가, 헌화가, 제망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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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양] 국어 - 혜성가, 헌화가, 제망매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1
Ⅱ. 慧星歌 ․․․․․․․․․․․․․․․․․․2
1. 지은이 ․․․․․․․․․․․․․․․․2
2. 지은年代 ․․․․․․․․․․․․․․․3
3. 內容 및 主題 ․․․․․․․․․․․․․4
Ⅲ. 獻花歌 ․․․․․․․․․․․․․․․․․․5
1. 지은이와 지은年代․․․․․․․․․․․5
2. 內容 및 主題 ․․․․․․․․․․․․․5
Ⅳ. 祭亡妹歌 ․․․․․․․․․․․․․․․․․7
1. 지은이와 지은年代․․․․․․․․․․․7
2. 內容 및 主題 ․․․․․․․․․․․․․7
Ⅴ. 맺음말 ․․․․․․․․․․․․․․․․․․8
※ 參考文獻․․․․․․․․․․․․․․․․․9

본문내용
I. 들어가는 말
‘鄕歌’는 이라는 특수문자로 표기된 노래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한국 시가문학의 여명기를 장식하고 있는 이 향가는 『三國遺事』에 14수, 『均如傳』에 11수, 도합25수가 전해오고 있다.
‘鄕歌’란 廣義로는 중국 시에 대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시가라는 뜻으로, 狹義로는 신라 시대로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사이에 제작된 이두(吏讀)식 문자로 표기된 詩歌다. 향가는 아득한 옛날 원시적인 미분화 종합 예술체 가운데서 배태된 국문학의 시원(始源)으로 원시적인 敍事文學期에 들어서자, 독자적인 문학으로 분화하여 구비적인 방법으로 유동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개인과 사회를 統一․團合시키는 기능을 발휘하였고 그 향유 방법은 항상 집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내용은 각국의 건국 신화에서 조상신의 神聖化, 英雄들의 행동 등을 讚揚하는 이른바 武勇談 등이다. 원시적 서사문학의 내용은 점차로 人智가 발달하고 그 감정이 순화함에 따라 개성의 覺醒을 보게 되고 과거에는 초인간적이요, 또한 영웅적이었던 데서, 인간적이고 범인적인 내용으로 변화하였고, 그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도, 전에는 객관적인 서술 描寫를 주로 하였으나, 주관적인 전달 호소의 방법으로 변화하였다.
그럼 향가가 처음 나타난 것은 언제였을까? 현존하는 향가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薯童繇』(新羅 眞平王代, 599年 以前)인데 기록 그대로를 신빙한다면 이는 6世紀경의 노래이다. 그러나 이 사실만 가지고서 향가의 성립을 6세기경으로 判斷한다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薯童繇』이전에도 비록 작품은 전해오지 않지만 작품명만이라고 알려져 오는 노래가 여러편 있기 때문이다. 5세기 전반인 때 『憂息曲』이 있었는가 하면 특히 1세기 초(A.D. 28) 때에 『도솔가』를 나라에서 제정하였다는 기록은 향가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로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口傳歌謠가 아닌 記錄歌謠로서 향가가 최초로 성립된 연대는 5년이고 그 작품은 『도솔가』이며 또 ‘嗟辭詞腦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세기초에 『도솔가』로부터 출발한 향가는 그 이후 형식과 내용 양면에 걸쳐서 점진적인 발전을 거듭한 끝에 현존하는 작품을 기준으로 해서 서기 6세기 전반 의 『彗星歌』에 이르러 10구체라는 詩형태를 낳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三國遺事』 14수중에서 「彗星歌」, 「獻花歌」, 「祭亡妹歌」를 중심으로 그 각각의 지은이, 연대, 내용 및 주제를 살펴 보기로 하겠다.

Ⅱ. 彗星歌
1. 지은이
彗星歌의 作者는 融天師이다. 향가의 작가는 실명이 아닌 경우가 많았으므로, 혜성가의 작가 융천사의 경우도 실존인물 여부가 의문시된다. 融天이란 이름의 뜻 그대로 하늘의 질서를 조화 있게 運行, 統制, 融和하는 人物을 象徵한 것이라면 혜성가의 내용과 부합이 된다. 융천사는 혜성가의 내용을 天體 혜성이 출현하는 것으로 일병의 侵入과 연관시키고, 혜성을 이로운 인물로 그려 災殃을 극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융천사는 實存人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융천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혜성가의 창작설화와 가요의 주제 등과 일치하는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향가의 작가 중 융천사와 같은 부류의 인물로는 충담, 월명사, 영재, 희명, 신충 등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융천사의 직분에 대해서는 僧侶 낭도라는 주장을 펼 수 있으나 이 승려 낭도는 전 화랑의 단체에 있어서 오직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무리를 지도하는 낭도 중의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융천사는 花郞團의 으뜸인데서 그의 부하 세 화랑과 그의 무리들이 참석하는 가운데 제의식 행사를 벌였을 것이다.
이 진평왕 때의 제의식 행사는 불교적이면서 재래 무속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으므로 무불습합적이었다고 봄이 옳다. 융천사는 혜성이 나타나게 되자 혜성가를 지어 부름으로써 소멸시켰는데 이는 낭승인데서 노래에다 주력을 담아 발휘했음을 의미한다. 융천사는 하늘의 조화를 잘 처리하는 인물로 붙여진 이름이다. 고대에는 천체의 이상스런 조짐이 보이면 제식을 올리고 고사를 지냈다. 혜성가는 그러한 때 불리어진 노래이다.
삼국유사 진평왕에서 혜성가는 융천사의 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융천사의 이름은 어렸을 때 불려진 것이 아니고 天文關係를 보는 안식이 영험했던 이후에 雅號 또는 別號로 붙여졌다고 할 수 있다. 新羅時代는 고대인의 정령숭배관념으로 의식이 사로잡혔던 때이기도 하다. 융천사는 천문을 보는 안목이 훌륭하고 세 화랑단의 우두머리였다. 세 花郞은 진평왕의 寵愛를 받았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護國의 충신이었음이 드러난다. 왕이 세 화랑 또는 그의 부대를 풍악에 유랑하게 한 것은 전부터 세 화랑부대가 일병을 물리치는 데 공헌이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융천사는 세 화랑단을 영솔하는 낭승이면서 忠臣이었다고 본다. 융천사가 혜성가를 부른 것은 그 시대 천문상에 이상이 생기고 일병이 침범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융천사는 說話的인 인물일 수 있다. 그가 진평왕 때의 혜성가를 지은 호국의 충신이라면 아명일 수 없고 아호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향가의 작가 중 배경설화와 노래와 인물이 일치하는 것은 설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 방면에 일가견을 이룬 데서 雅號가 생긴 것이라 보아진다. 그런 데서 아명보다 아호가 더 많이 알려짐에 따라 노래의 작가로 쓴 것이 아닐까 한다.

2. 지은年代
혜성가의 창작연대는 일병의 침입이 잦고 혜성이 心大星을 범하고 일병이 신라를 침범하자 이를 불길한 징조로 보고 제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에 융천사가 혜성가를 지어 제액함에 따 혜성도 消滅되고 일병도 還國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다분히 무속적이고 밀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佛敎 수용에서 土俗信仰과 접합관계가 밀교로 나타나 융천사는 무적, 밀교적 낭승이었다. 더구나 진평왕(579~632) 때에 三岐山을 중심으로 밀교가 대두했음을 볼 때, 융천사도 密敎와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무속관념이 불교사상과 습합했으므로 융천사의 영험스러움과 노래의 주력을 믿을 수 있었다. 신라는 별의 변괴와 일병의 침입에 대한 재액으로 인하여 융천사가 제의식에서 혜성가을 지어 부름으로써 전과 같이 평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사연표와 같이 일본서기의 기사대로 혜성가의 製作年代는 未詳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헬리혜성은 76년만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거하면 진평왕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다만 천재지변에 관한 기록이 전할뿐이고 ‘혜성범심재성(彗星犯心大星)’이라고 할 만한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평왕 29년에 혜성이 심대성을 범했다는 기사와 일병이 침범했다는 역사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혜성가의 제작연대를 진평왕 29년이니 45년이니 하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학설이다.
진평왕 때 혜성이 출현한 것은 진평왕 원년(579), 16년(594), 29년(607), 45년(623)이 되는데 혜성가를 융천사가 제의식을 거행할 때 지은 것이 확실하다면 핼리혜성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진평왕 29년 설이 가장 유력시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연대는 미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 參 考 文 獻
1. 김승찬, 「향가문학론」, 새문사, 서울 : 1986
2. 김준영, 「한국고전시가연구」, 형설출판사, 서울 : 1990
3. 백영 정병욱선생 10주기 추모논문집 간행위원회, 「한국고전시가 작품론1」,
서울 : 집문당, 1992.
4. 박노준, 향가, 「열화당」, 서울 : 1991
5. 정병욱, 「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서울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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