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보현십원가 작품분석, 평가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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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가] 보현십원가 작품분석, 평가와 의의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에 대해
1) 작가는 누구인가?
2) 어디에 실려있나?
3) 왜 지었을까?
4) 왜 인가?

3.
1) 내용적 측면
2) 형식적 측면

4. 작품분석
1)隨喜功德歌
2)總結無盡歌

5. 평가와 의의

6. 나오며

7. 참고문헌

8. 첨부자료
본문내용
②《균여전》의 창작에 관련된 사람들이 창작한 것?
《균여전》의 주에는 “傳中不載歌詞 今錄付之”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의미는 “본래 《(균여)전》에는 가사(향가)가 없었는데, 이제 더하여 싣는다.”이다. 본래 《균여전》에는 〈보현십원가〉가 적혀있지 않았었는데, 그 후에 《균여전》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곧, 균여가 짓지 않은 향가를 《균여전》을 지은 누군가가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균여전》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한 일승(一乘)이란 스님, 균여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 창운(昶雲), 《균여전》을 지은 혁련정(赫連挺)의 3명이다. 아마 혁련정이 《균여전》을 집필하면서 일승과 창운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균여전》에 향가를 첨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③ 구전되어 온 향가?
위에서 말했던 《균여전》의 주에 기록된 “傳中不載歌詞 今錄付之”의 기록에 따르면, 《균여전》의 〈보현십원가〉를 누군가가 창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구전되어 온 향가를 창작자들이 《균여전》에 실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보현보살은 불도 수행의 실천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보현십원가〉를 주로 부른 대상은 민중이었을 것이다. 향가는 본래 노래였을 것으로 추정되니, 〈보현십원가〉도 일종의 노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마도 하나의 가락이나 멜로디에 불린 노래였을 것이다. 만약 노래의 가락이나 멜로디가 복잡하다면 외워서 부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애국가처럼 하나의 가락에 가사만 바뀐다면 충분히 쉽게 외우고 암송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한 〈보현십원가〉의 형식상 특징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애국가의 경우에도 1절부터 4절까지 가사의 형식이나, 글자수가 거의 유사하다. 그러기에 외우기 쉬운 것으로, 앞서 말했듯 〈보현십원가〉11수의 형식이 10구체로 동일하며, 글자 수도 거의 일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보현십원가〉는 사람들이 쉽게 외워서 부르는 찬불가(讚佛歌)와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보현보살을 통하여 민중에게 불교를 전파하고자 한 누군가(균여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음)가 창작하여 민중에게 구전되어 오다가, 고려조에 이르러 《균여전》에 실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전되어온 향가를 왜 굳이 《균여전》에 실었는 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균여가 교종에 속했으면서도 민중에게 불교를 쉽게 전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민중에게 다가서고자 한 그의 노력이 보현보살의 모습과 맞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어디에 실려있나?
보현십원가는 에 실려있다. 원명은 《대화엄귀법사주원통수좌균여전(大華嚴歸法寺主圓通首座均如傳)》이다. 균여의 제자들이 제공한 자료에 의해 찬술되었다. 전체 10문 중 제7문인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에는, 균여가 보현십원(普賢十願)에 따라 지은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이하 l1수의 향가가 실려 있고, 제7의 전문(前文)에는 그 작가의 유래를 밝혔다.
또 제8 〈역가공덕분(譯歌功德分)〉에는 균여와 같은 때의 사람인 최행귀(崔行歸)가 이를 한시(漢詩)로 번역한 것이 함께 실려 있다. 희귀한 향가가 실려 있다는 점에서 《삼국유사》와 함께 고대 국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해인사(海印寺) 소장의 대장경보판(大藏經補板) 중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 권10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3) 왜 지었을까?
이 노래는《균여전》〈가행화세분〉에 있는데 이는 ‘법가를 유행케 하여 속세를 교화하려는 의도’이다. 이에 나와 있는 창작의도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사뇌란 것은 세상사람들의 유희와 오락의 도구요, 부처님께 소원하는 것은 도를 닦는 요체이다. 얕은데를 지나서 깊은데로 들어가고, 가까운 것을 좇아서 먼 것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일을 자료로 하여 불교와 연분이 적은 사람을 끌어 들여야 한다. 이제 알기 쉽고 가까운 일로 미루어서 생각해 내기 어려운 먼 근원을 알게끔 열한수의 거칠은 노랫말은 만드니 뭇사람의 눈앞에 내놓기는 극히 부끄러우나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비록 뜻이 덜 되고 말이 어그러져 성현의 오묘한 취지에 맞지 못하더라도 일반 세속사람들의 선행을 닦는 뿌리가 생기기를 바란다. 웃으며 외우고자 하는 이는 그 외우는 염원의 인연을 맺을 것이고 헐뜯으며 생각하는 이는 염원하는 이익을 얻을 것이니 후세의 점잖은 분네께 엎드려서 청하거니와 헐뜯거나 예찬하거나 이것은 관계치 않는다.

이 노래가 사람들의 입에 널리 퍼져서 이따금씩 여러 담벼락에 써 붙여지기도 하였다. 사평군에 급간(벼슬이름)으로 있는 나필이 삼년동안 중병을 앓았는데 균여대사가 보고 가엾이 여겨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늘 읽으라고 권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공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