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지리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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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프리카 지리 조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어원
Ⅱ. 주민
Ⅲ. 역사
Ⅳ. 경제
Ⅴ. 지리
Ⅶ. 지형
Ⅷ. 정치
Ⅸ. 나라
Ⅹ. 노예

본문내용
1) 구석기시대
현재 발굴된 가장 오래된 원시인의 두개골은 1924년에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는 100만년전의 것이며, 1959년 탄자니아의 올두바이계곡에서 발견된 것은 170만년전의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프리카 대륙이 *인류의 발생지 인류의 발생지와 올두바이협곡인류가 직립한 원인은 아프리카에 있었던 대화재 때문이라고 하며, 이것은 학자들이 확인한 것이다. 이때에 원시인은 불에 쫓겨 해안에 도달하였고, 화재로 인하여 육지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여 바다에 들어가 되었고, 얕은 곳에 있는 것의 먹이가 줄어들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서는 것이었고, 이것이 인간을 직립하여 걸어 다니게 된 원인이라고 한다. 또 바닷가 모래나 바위 위에 자연히 앉게 되므로, 여성은 성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엉덩이가 커지고 성기가 앞으로 오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아기는 엄마가 이동 할 때에 항상 등 뒤에서 원숭이처럼 엄마의 머리카락을 잡고 스스로 버티었다. 잡을 것이라고는 엄마의 머리카락뿐이기도 하였지만 잡기도 쉬웠다. 그 증거로 지금도 아기의 손아귀 힘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이 지금도 머리카락이 길고 대머리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올두바이협곡1931년부터 L. 리키는 20년간 올두바이협곡을 발굴하여 층위별로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군과 동물화석 등을 발견했으며, 또 175만 년 전 추정되는 인골(人骨, 약 16세 추정)을 발견하여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로 명명하였다. 1964년에 리키는 진잔트로푸스보다도 더 하층에서 보다 진보된 형질을 갖춘 인골을 발굴하여 '호모 하빌리스'라 명명하고, 올두바이 제1층의 석기를 만든 인류는 진잔트로푸스가 아니라 이 호모 하빌리스라는 견해를 발표했다. 호모 하빌리스만 유일하게 원인(原人)으로 진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올두바이협곡에서는 100만 년 전을 경계로 하여 전기구석기시대문화가 2가지로 나누는데 원인들은 자연석에 날을 깎을 때 단순하게 한 부분만 가공한 초퍼와 양측을 가공한 초핑툴을 남겼다. 참고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남방의 원숭이'이란 뜻으로 인간과 유사한 원숭이 즉 '원시인'과 같은 부류의 총칭한 것으로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이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한 부류이다.
라고 주장하는'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
학자도 있다. 아프리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시대 이후부터 다시 수십만 년이 지난 다음 구석기시대의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여 돌로 만든 아름다운 창끝을 만들어냈다. BC4000-BC1000년경까지 나일강 하류를 중심으로 고도의 문화가 일어나 인류사(人類史)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빛나는 문화가 번영하였다. 구석기시대부터 이슬람 침입까지의 각 시대의 신전, 성채, 비문, 분묘 등의 현존하는 유적이 많으며, 이 유적이나 유물을 보아도 빛나는 문화가 번영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프리카 문화는 북아프리카(North Africa)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2) 북아프리카 고대 역사
아프리카 문화는 북아프리카(North Africa)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 이집트와 누비아
이 지역은 사하라사막의 북쪽과 동쪽에 이르는 지역을 말하며, 일찍이 나일강 유역에는 이집트왕국과 이집트인이 놉(Nob:노예)이라 부르는 '누비아(Nubia)'인이 만든 문명이 있었다. 누비아 지역은 황금과 석재의 산지이며 또 상아와 흑단이라는 석재 그리고 진귀한 동물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오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 이집트 국왕들은 때때로 원정하여 이곳을 영유하였다. 그리고 BC1450년 무렵부터는 누비아인들이 세운 쿠쉬왕조가 나파타 (Napata)를 수도로 하여 번성하였고, 이 때문에 수도 이름을 따라 나파타왕국이라고도 하였다. 쿠쉬왕조는 제철(製鐵) 등의 기술을 바탕으로 높은 문화를 유지하였다. 기원전 9세기 무렵 누비아인들이 상 이집트 전역과 중 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여 대규모 피라미드군을 건설하였다.
(2) 카르타고(Carthago)와 로마
카르타고라의 어원은 로마인들이 페니키아어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부른데서 기인한다.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으며,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인)라 불렀다. 고대 페니키아(성경:베니게)인이 북아프리카의 튀니스만 북 연안에 건설한 도시 국가이다. 현재는 튀니스(Tunis)의 수도 튀니시아(tunisia) 지역으로 창건연대는 BC720년경으로 추측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여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는데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와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BC600년경에는 서지중해

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과 사르데냐 및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시칠리아섬 전체를 장악하였다. 그들에게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었다. BC 6세기에서 BC540년경 사이 시칠리아의 패권을 두고 그리스인과 충돌하였으며, 서지중해의 해상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