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안용복장군

 1  [국사] 안용복장군-1
 2  [국사] 안용복장군-2
 3  [국사] 안용복장군-3
 4  [국사] 안용복장군-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국사] 안용복장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문제제기
2.당시의 상황
3.안용복의 업적
4.왜 일본은 독도를 탐내는가..
5.결과와의의
6.현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정책
7.우리들의 생각

1. 공도정책을 펼친 이유가 왜구침입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2. 오타니 집안과 무라까와 집안이 울릉도에서 행했던 사업은 무엇인가?
3. 평범한 어부인 안용복이 일본어를 할 줄 알았나?
4. 일본이 일개 평범한 어부인 안용복의 상소를 무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시하지 않은 이유는?
5. 안용복은 왜 처형 당했나?
본문내용
1.문제제기
안용복.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울릉도, 독도는 우리땅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가 오르내린다. 그는 평범한 상민이었다. 그는 조선시대의 법을 위반한 죄인이었다. 그의 출생지도, 출생 연도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 너무나 평범한 조선백성이었다. 어떻게 일개 평민으로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할 수가 있었는가? 독도의 현재는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구 침입 등 의 이유로 울릉도. 독도에 대해 공도정책을 펼쳤던 당시의 상황과 일본과의 외교 마찰로 국민들의 독도 입도를 지극히 제한하는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비슷하다. 안용복의 자취와 당시의 조선조정의 정책을 되짚어 보며,300여년이 지난 오늘의 현명한 독도영유권 대응방침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 한다.?

2.당시의 상황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어부였으며 동래부에서 태어난 평범한 상인이었다. 안용복이 살았던 시기는16C~17C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왕조가 울릉도와 독도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때에 왜구의 노략질이 시작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에는 조선인들만 밀입 하거나 출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출어하거나 밀입 하여 고기를 잡고 나무를 도벌하는 형편이었다. 이무렵 1614년(광해군 6년) 6월에 대마도주는 조선 동래부에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분부로 독도. 울릉도를 탐견 하려고 하니 길 안내를 내어달라 라고 하였다.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가 조선에 속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또한 도민을 소환한 기록도 명백하게 있으므로, 앞으로 이런 일본 측의 같은 시도가 있으면, 이러한 모든 내용과 함께 대마도주에게 강경한 내용의 문서를 주어 막부에 보고하도록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일본인의 왕래를 금지하도록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지시하였다. 이듬해 1615년에도 일본 배 2척이 와서 울릉도의 형지를 탐험하러 간다고 하였지만 동래부사는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꾸가와막부는 1618년에 오타니 집안과 무라까와 집안에게 울릉도 도해 면허를 허가해주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막부에서 두 사람의 도해를 승인할 때, 두 사람이 막부에 낸 출원서 에는 울릉도가 무인도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며, 막부도 그런 이유로 승인했다는 부분이다. 오타니는 1625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오타니의 사망으로 곤란해진 무라까와는 오타니 대신으로 오타니의 숙부인 곡현번의
참고문헌
참고자료: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1&docid=292698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61402&docid=246773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1&docid=130155
http://100.daum.net/DIC/detail?id=1580490&sname=안용복&ty=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