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

 1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1
 2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2
 3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3
 4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4
 5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5
 6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6
 7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7
 8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8
 9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사] 단군, 과연 존재했을까(부정설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고조선의 건국시기/영역

1. 건국시기문제-고조선의 건국과 청동기 문화
2 . 영역문제

Ⅲ. 단군의 실존 여부 – 단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1. 단군신화는 만들어진 신화

(1)신화의 개념

(2)역사적 맥락 속의 단군신화

(3)’한단고기’의 허구성


2. 신화 속의 단군

3. 단군릉에 대한 인식


Ⅴ. 나오며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2 . 영역문제

고조선에 관한 사료가 부족하고 단편적이기 때문에 고조선 영역 논쟁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역사 지리적 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민족주의 감정 때문이다. 일본의 관학자들이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주장한 데 대한 여러 반론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시을 대동강 유역으로 본 견해는 일본 관학자들의 독창적 연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중심을 대동강 유역으로 보기 시작했던 것은 고려 시대부터 이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이런 견해가 보다 합리적으로 쳬계화되어 오늘날 학계의 통설로 인정된 것이다.
현재 현행 국사 교과서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분포를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은 요서지방까지 모두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영토로 가진다. 영역 문제는 고조선이 실질적인 국가였는지에 대해서도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다. 고조선의 성립 시기가 한반도 청동기 문화에 비해 이르다고 해도 요서지방의 빠른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통해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요동지방과 요서지방까지 아우르는 영역 통치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은 대표자는 윤내현 교수이다. 그는 고고학 발굴내용을 인용해 가면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요서, 요동을 이동해 갔으며, 한반도, 요동, 요서지방의 많은 종족들을 지배하에 둔 연맹국가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단점은 요서지방이나 요동지방의 고고학적 유적, 유물의 유사성만을 강조했을 뿐 큰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또 요서지방에 중심을 둔 고조선이 대 영역국가도 아니면서 문화적 차이가 있는 요동이나 먼 한반도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좀 과장된 주장이다. 요하 유역으로부터 한반도에 걸쳐서 각지에 산재해 있던 성읍 국가 중의 하나인 고조선의 위치를 중국의 문헌에 의해서 고증해 보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한 일이다.
또 고고학적인 자료 의하여 가장 빠른 것을 무조건 고조선이라고 하는 것도 반드시 그 정확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송양국보다 뒤에 건국한 고구려가 송양국을 정복하여 대고구려로 발전했듯이 또 후진국인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했듯이 고조선 성읍국가가 최초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고 보장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인 발굴에 있어서는 조선이라는 문자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모든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서 영역분포를 파악하는 일, 특히 비파형 동검을 통해서 고조선의 영역분포를 파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초기의 고조선이 요하 유역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증거의 제시가 필요하다.

Ⅲ. 단군의 실존 여부 – 단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1. 단군신화는 만들어진 신화

(1)신화의 개념

신화란 원시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논리 구조에 따라 어떤 사실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없는 먼 옛날의 역사들은 숱한 세월을 거치면서 그들의 과거에 대한 총체적 관념인 신화의 형태로 기록되어 왔다. 따라서 신화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신화에서 구체적인 사실보다 상징적인 시대상을 추출하는 데 그칠 수 밖에 없다. 단군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의 시대상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는 사료는 될 수 있지만 정사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단군신화가 신화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단군 신화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대하기 보다 고대인들의 생활상을 읽는데 서 그쳐야 한다.

(2)역사적 맥락 속의 단군신화

특히 신화는 지배층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오랜 세월을 거쳐 변색되어 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에 삼국은 각각의 독자적인 건국신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고구려 인들은 천제의 아들이 고구려를 세웠다고 인식하고 있었다.(주몽신화) 따라서 삼국시대에는 단군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고려전기 역시 고려 정부는 자기 왕조 정통성의 주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삼한일통을 강조했다. 고려정부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연원이 삼한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는데 그 전 시기의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고려인들이 삼국 이전 시기의 역사와 단군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 30여년간의 치열한 대몽 항쟁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단군과 단군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3세기 말 몽골 간섭기에 단군과 단군 조선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제왕 운기에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고조선은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조선 왕조의 지배세력들은 단군과 관련된 비합리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개국 시조로서의 존재를 부각하고자 했다. 민간신앙적 숭배대상으로 단군의 제사를 지내던 구월산 삼성당을 폐지하고 평양에 단군을 개국조로 모셔 치제하는 단군사당을 건립했다. 또 단군 신화자체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개작하려 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단군 개인의 재위 연수를 1천년 이상으로 간주한 것을 두고 권근 ‘응제시’ 이후 ‘동국세년가’,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같은 조선시대 관찬사서에서는 단군의 자손이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린 연수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자리잡은 것은 바로 조선시대에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이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일제시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박은식, 신채호 등도 여기에 포함)은 단군을 부정하려는 일제에 대항하여 단군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이 시기 민족주의자들은 만주의 지배 족속이었던 여진 거란 몽골 등을 모두 배달족이라는 이름아래 동족으로 간주하고 배달족 전체의 시조를 단군에서 찾으며 단군 이래의 고유 신앙을 민족 문화의 핵심으로 높이 선양했다.
이 시기 조선사 편수회 중심으로 일본 관학자들이 연구한 조선사에서 단군조선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일제 관학자들은 위서에 나온다는 단군전설이 현재 남아 있는 25사의 한 책인 위서에 보이지 않으니 허구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고려 중기에 편찬된 ‘고려 도경’이나 ‘삼국사기’ 등에도 단군에 관한 언급이 없고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단군신화는 ‘삼국유사’ 편찬 당시 만들어져 유포된 것으로 보았다. 또 내용상으로도 황당할뿐더러 불교 이야기가 많이 섞여 있어 승려 일연이 조작한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일제어용역사단체에 의해서 많은 역사왜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족적 감정에 치우친 민족사학자들의 관점이 옳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민족사학자의 역사관 역시 실증에 취약하고 국수주의적이라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민족 감정을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송호정
책임편집 이기백 1988
2001년 3월 5일 연합 뉴스 기사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