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김일성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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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김일성과 박정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두 인물 조사

1) 출생, 가정환경

(1)김일성

(2)박정희

2) 경제적 측면 (효율성)

김일성

(1)천리마 운동 (千里馬運動)

박정희

(1) 1,2 차 경제개발계획

(2) 차관경제

(3) 수출제일주의 정책

(4) 산업구조의 고도화 (중화학 공업육성)

3) 사회적 측면(형평성)

김일성

박정희

(1) 7 ․4 남북 공동성명(共同聲明)

(2) 유신체제(維新體制)

(3) 사회운동

[1] 노동운동(勞動運動)

[2] 학생운동

3. 두 인물 재조명

1)천리마운동과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바라본 경제적 관점

(1)경공업이냐 , 중공업이냐

(2)외세의존이냐, 자립경제냐

(2) 유신( 維新 )과 유일 체제를 통한 대중과의 관계 차이

* 유신체제(維新體制)

1) 유신체제 형성의 배경

2) 유신체제 확립 과정

3) 국민의 반응

* 주체사상(主體思想)

1) 주체사상의 정의

2) 주체사상의 내용

3) 주체사상의 역사적 배경

4)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

* 김일성 유일체제

1) 권력 집권 과정

2) 유일체제 확립 과정

3) 국민의 반응

□ 박정희와 김일성의 권력장악과 그 차이
본문내용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1956년 김일성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1958년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천리마 속도. 천리마 직장. 천리마 기수. 이중 천리마 작업반 등의 용어와 훈장 칭호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1972년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 제13조에서는 “천리마 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운동의 전개로 제1차 5개년 계획(1957~1961)은 전 부문에 걸쳐 예정보다 1년 빠른 4년 만에 목표를 달성하였다고 할 정도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생산 증대를 위한 노동력 강화가 효과적으로 이주어져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초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축적 없이 노동력의 단순 투입 증가로 인한 경제 성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국가 주도(國家主導)의 경제개발정책(經濟開發政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 2차 경제계발계획을 통해 한국경제의 양적 성장을 주도 했다. ‘한강변의 기적’ 이라고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경제성장(經濟成長)은 대단했다. 그리고 수출 제일주의 정책(輸出第一主義政策)을 펼쳤다. 군부정권(軍夫政權)은 자본과 기술이 없고 국내시장이 협소한 상태에서는 수출을 통해서만 공업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온 힘을 수출에 모았다. 그리고 70년대는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한국경제는 지나친 차관도입(借款導入)과, 미국, 일본 등의 차관에 의지한 종속(從屬)적인 경제 상태를 만들어 냈다는 단점도 들어냈다. 한 예로는 60년대 말, 70년대 초 달러위기에 몰린 미국은 경공업 제품수입을 규제하자, 우리의 수출량이 적어지면서 우리 경제도 위기가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1) 1,2 차 경제개발계획
60년대 초 한국경제는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대 경제성장률(經濟成長率)은 1.9%에 지나지 않았고 1인당 GNP도 80$에 머물렀다. 그래서 군부정권은 50년대 원조경제를 재편하고 인플레와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 경제개발을 서둘렀다.
1962년 1월 5일 발표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은 자유경제의 구축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1차 계획은 ‘자립경제(自立經濟)의 구축’ 을 위해 에너지원을 확보하고 기간산업,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1차 계획은 노동집약적(勞動集約的) 경공업을 육성 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처음 경제계발계획에서 가장 눈 여겨 보야 할 점은 자립경제의 달성 부분이다. 투자재원(投資財源)을 마련하는 방법을 보더라고 내자가 72%를 차지하였고 외자는 28%에 지나지 않아 국내 자본으로 경제개발을 추친 하려한 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낮은 국민저축룰로는 국내에서 자금을 모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부는 1962년 6월 10일 화폐단위를 1/10 로 절하하는 통화개혁(通貨改革)과 예금을 동결하는 긴급 신용 장치로 산업자금(産業子芩)을 모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경제활동 위축되었다. 결국 자본 조달에 실패하자 미국은 투자재원 조달이 비현실적이라며 외자에 의존한 개발전략을 채택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외국에 의존하는 계획을 세운 박 정권은 1964년에 현실과 동떨어지게 낮았던 환율을 두 배로 올리는 단일변동 환율제(換率制)를 채택하고 외자도입법(外資導入法) 제정(1966),GATT가입(1967)으로 적극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다.
1차 계획의 성과를 바탕으로 박 정권은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 확립촉진’을 기본목표로 하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을 추진하였다. 식량자급, 수출증대, 철강화학공업의 기계화에 주력한 이 기간에 경제성장률은 10.5%에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