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이해-한국개신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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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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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본론
1.해방과 새로운 출발
2.6.25전쟁과 교회
3.교단분열과 새로운 교단의 탄생
4.인권 및 민주화 운동



본문내용
(1832~1884)
(최초의선교사 귀츨라프의 내한)
*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사람은 독일 출신의 귀츨라프임.
* 1832.7.23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에 정박하여 성서 및 전도 문서를 전달하며 조선 정부와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조선 정부의 배외 정책으로 인하여 실패.
(윌리암슨의 한국 선교 지원)
*윌리암슨은 한국션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원.
*1865년 가을, 죽음을 무릅쓰고 황해를 건너 온 두 한국인을 접촉하였던 토마스 선교사는 이들과 함께 한국에 갈 것을 결심하고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한국을 방문.
*윌리암슨은 만주를 통한 한국선교에도 노력함.
*1867년 만주 여행에서 봄철 개시에 참여하려는 한국 상인들에게 전도.
*그해 가을철 개시때에는 책문에까지 가서 전도하고 한국에 관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
*윌리암슨의 요청에 의해 중국내지 선교회 소속의 의료 선교사 다우웨이트가 한국을 방문.
(토마스와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1차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서해안에 2개월 반동안 체재하면서 성서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 실시.
*북경에 체류하다가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동기에서 동승하게 됨.
*셔먼호의 오만한 개항 요구와 평양 군민들에 대한 포악한 행동으로 셔먼호는 불타고 전원 사망하게 됨.
(만주에서의 전도)
*중국을 통하여 한국 선교를 시도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만주에 진출했던 로스 선교사또한 한국에 대한 선교를 시도.
*로스 선교사는 쇄국정책의 한국이 언젠가는 선교의 문이 열릴것을 믿으며 성경번역사업에 전력을 기울임.
*성서 공회의 지원을 받아 출판하게됨. 그후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1877년부터 신약전서인 를 간행.
*1882년 3월 이 간행되면서 로스는 반포가 자유로운 한인촌을 대상으로 반포사업실시.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 겸 권서로 삼아 파송함.
*1882년 대영성서공회는 서상륜을 권서로서 한국에 파송.
*그는 20명의 구도자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침. 개인집을 돌아다니다가 1886년 경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주일 정기예배를 드림.
*이것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한국교회의 출발의 전형이자 요람으로 불리는 소래 신앙공동체의 시작.
(1885~1906)
(의료와 교육선교)
*미국공사관 소속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신임을 얻음.
*그후 1885년 광혜원 병원을 세움.
*이병원은 위료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기관을 위해서도 훌륭한 전초역할을 함.
*광혜원은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음.
*오늘날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게됨.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각종 문서와 서적을 출판해 냄으로 기독교 복음 전파가 한결 쉽게 되었음.

(만주에서의 전도)
*중국을 통하여 한국 선교를 시도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만주에 진출했던 로스 선교사또한 한국에 대한 선교를 시도.
*로스 선교사는 쇄국정책의 한국이 언젠가는 선교의 문이 열릴것을 믿으며 성경번역사업에 전력을 기울임.
*성서 공회의 지원을 받아 출판하게됨. 그후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1877년부터 신약전서인 를 간행.
*1882년 3월 이 간행되면서 로스는 반포가 자유로운 한인촌을 대상으로 반포사업실시.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복음서를 가진 전도자 겸 권서로 삼아 파송함.
*1882년 대영성서공회는 서상륜을 권서로서 한국에 파송.
*그는 20명의 구도자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침. 개인집을 돌아다니다가 1886년 경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주일 정기예배를 드림.
*이것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한국교회의 출발의 전형이자 요람으로 불리는 소래 신앙공동체의 시작.
(1885~1906)
(의료와 교육선교)
*미국공사관 소속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신임을 얻음.
*그후 1885년 광혜원 병원을 세움.
*이병원은 위료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기관을 위해서도 훌륭한 전초역할을 함.
*광혜원은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었음.
*오늘날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하게됨.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각종 문서와 서적을 출판해 냄으로 기독교 복음 전파가 한결 쉽게 되었음.



10.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
1) 8.15 해방과 교회의 재건 운동 (1945~1949)
A.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감리교, 장로교 교단 환원
a. 조선기독교단 남부대회
해방당시 유일하게 존재하던 교단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었다.
이 교단은 해방직전인 1945년 7월 19~20일 종교통합 정책에 의해 조직되어 8월 8일부터 전국에 교구를 조직했다.
통리였던 김관식을 필두로 장로교 인사로는 김영주 김춘배 박용의 함태영 최거덕 김종대 등이,
감리교 인사로는 강태희 김영섭 방훈 신공숙 심명섭 등이 참여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판을 내리고 '조선기독교단'이라는 새 이름으로 남부대회(1945. 9. 8.)를 소집했다.
그러나 개회벽두에 변홍규 이규갑 목사 등 수십 명의 감리교 대표자들이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교회조직으로 개편하려는 노력은 성과 없이 끝났다.
b. 제 1회 조선 기독교 남부대회 (1945. 11. 27~30)
11월에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 조선 남부 대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이 대회에서 임원진을(회장 김규식) 선출하고 일제 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를 갖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남부대회는 선교사 내한을 요청하고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 독립을 위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하기로 했다.
또 교회신문인 '기독교 공보'를 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남부대회는 안팎으로부터 도전과 난관에 직면했다.
9월 새문안교회 모임에서 퇴장했던 감리교 지도자들의 재건 선언은 남부대회의 진로에 큰 장애가 되었다.
또한 장로교에서도 기존의 장로교 체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면서 지방에서 노회를 재건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결국 1945년 11월 3일 경남노회가 재건되었고 12월에는 전북노회가 재건되었다.
통일의 여망 때문에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교역자들도 남쪽 교회만의 총회 구성을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남부대회는 친일교단 잔존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c. 제 2회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1946. 4.30.~5.2.)
대회장을 김관식 목사에서 배은희 목사로 바꾸고 분위기를 쇄신해 보고자 했으나 결국 해체를 위한 모임이 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였다.
d. 남부대회 해산
- 감리교
감리교 재건을 위하여 1945.12.17 감리교 유지 위원회 결성하고, 연회를 조직한 후 감리교 신학교를 통해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재건파라고 불린 이 조직은 대표적 친일행위자인 정춘수가 감독이 된 1939년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와 규정을 부인하였다.
재건파에 맞서 남부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1946년 특별총회를 개최하여 강태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자신의 조직을 복흥파로 불렀다.
- 장로교
경남노회를 시작으로 지방노회 재건이 추진되어 1946년 초까지 남한 지역의 노회 재건이 사실상 완결되었다.
남부 총회는 총회장으로 배은희, 부총회장에 함태영을 선출하였다.
1947년 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 2차 남부총회는 1942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체되었던 장로회 제 31회 총회를
계승하여 제 33회 총회로 개회하였다.
이것은 1943년에 조직된 친일적인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을 부인하고 그 이전의 장로교단에서 정통성을 찾는 형식을 취한 조치였다.
e. 조선 기독교 연합회
1946년 교파 연합운동 기구로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재입국한 각국 선교부와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 청년회, 대한 여자 기독교 청년회를 포함한 당시 남한 기독교를 대표하던 거의 모든 단체들이 참여했다.
조선기독교 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기독교 연합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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