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에네켄`으로부터 시작되는 멕시코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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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수민족] `에네켄`으로부터 시작되는 멕시코 이주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멕시코 이민사
2. 후손들의 이야기
3. 멕시코 한인사회의 붕괴
4. 맺음말
5. 참고자료
본문내용
“여기 사람들은 한인들을 보면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어. 치노들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〇〇〇(?,??)

이와 같은 말이 생긴 이유는 한인들이 ‘코모 치키토(Como Chiquito)’와 ‘코모 포키토(Como Poquito)’를 잘못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포키토(Poquito)’ 양이 적다는 말이고, ‘치키토(Chiquito)’는 크기가 작다는 말인데 어린이를 칭할 때도 사용한다. 한인들이 음식을 적게 먹는다는 표현을 ‘코모 치키토’라고 잘못 표현해서 어린아이를 먹는 인종으로 와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만큼 현지 사회에서 한인들을 적대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로 대도시에 살고 있는 이민 후세는 초등학교 내지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고, 환경이 조금 더 좋은 사람들은 대학교까지 진학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농장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아직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현지에 정착해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멕시코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들의 이민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뿐 아니라 이민 후에도 고국과 연결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적인 정체성을 쉽게 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한국계 멕시코인도 아니고, 멕시코계 미국인도 아니야. 단지 멕시코인일 뿐이야." 호르혜 (남,??,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한 한인3세)

또한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에게 한국인의 후손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과연 그들을 위한 일인지,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한다.

3. 멕시코 한인사회의 붕괴
인조섬유의 발달로 인해 에네켄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하여 멕시코의 한인들의 경제적 빈곤이 더욱 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전체인원의 1/4이 넘는 280여명의 한인이 사탕수수 농사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쿠바로 떠나게 되면서 멕시코 한인의 결집력이 약화되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 한인회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한인회의 주축이 된 이민 2세대는 대부분이 멕시코 사회에 동화되어 있었고 언어 또한 상실한 상태였다.
이민 2세대가 멕시코에 쉽게 동화되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민 2세대의 한 할아버지는 일부러 자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멕시코 말을 못하는 그에게는 한국어가 가난의 상징이었고 자신의 가난을 물려주기 싫은 마음에 자식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인은 치노라고 불리며 차별을 받았다. 특히 아이들이 많이 놀림을 받았는데 이름(성)이 한국 이름이라든지 부모가 한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대우를 받았다. 2세들은 대부분이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부모들이 귀국의 꿈을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아서 멕시코의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구비서류의 미비 셋째, 한국인의 입학거부 등의 복잡한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1962년 대한민국과 멕시코가 국교를 수립할 당시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한인회의 활동은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많은 한인이 산재하여 살고 있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지방회는 유명무실하였고, 멕시코시티의 묵경지방회도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한민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대사관의 지원으로 묵경지방회가 복원되었지만 한인 후손들의 구심점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인 후손들 간의 결집력이 약하였고 한인회에 대한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후기 이민자가 멕시코에 정착하는 것은 국교가 수립된 1960년대부터이며, 유학생이나 사업을 위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후기 이민자 중심의 한인사회가 형성되면서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어 온 한인회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한인회는 이질적인 두 집단을 결속시키는 유일한 조직체였다.
1979년부터는 한인회 회장이 후기 이민자들에게서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후기 이민자들의 권익과 다양한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조직체로 전환되지 못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후기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친목을 대변할 수 있는 한인경제인연합회를 1994년에 구성하였고, 1996년 후기 이민자가 중심을 이루는 현재의 한인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후기 이민자 중심의 한인회가 창설되면서 기존의 한인회는 한인 후손들만의 조직체로 전락하였고 활기를 잃으며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한인 후손들과 후기 이민자들 간의 명목적인 관계조차 단절되었으며 멕시코 한인 사회는 후기 이민자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 맺음말
현재 멕시코의 한인들은 멕시코 각지에 흩어져 자리를 잡고 지금은 정치, 경제 분야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멕시코 시민으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채무에 의한 이주 노동자로 현재의 자리를 잡기까지 몇 세대 동안의 가난과 차별의 어려움을 견뎌낸 것이다.
멕시코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로 나가있는 초기 이민 세대들을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어려움 속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한국인의 자랑스러움을 느끼고 세계화의 진행 속에 그 사람들의 역할에 주목하고 한국과 그들의 나라의 가교 역할에 기대를 하고 있다.
척박한 조건을 극복하고 전 세계 각 나라에서 정착해 살고 있고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지만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경제적, 인종적으로 차별하는 태도는 모순이며 이기적이다.
불법체류 이주 노동자 20만 명을 비롯하여 전체 이주노동자가 40만 명인 지금, 유엔에서 보장한 이주민협약도 지키지 않고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하며 경제적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피부색에 따른 인종적 차별, 순혈주의에 의한 정주화 반대가 지금 우리가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참고문헌
참고 문헌
김원동, 2003 《이민 100년 그리움 100년》 서울 : 리북
이강혁, 2008 《라틴아메리카역사 다이제스트 100》 서울 : 가람기획
이자경, 1998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 제물포에서 유카탄까지》 서울 : 지식산업사
이자경, 2005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 :에네켄 가시밭의 100년 오딧세이 上, 下》 서울 : 한맥문학출판부
정경원, 2005 《멕시코 쿠바 한인 이민사》 서울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논문
박영미, 2003
월간 말, 1995
이종득, 2004
이자경, 1998
주종택, 2000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신문기사
매일경제 2005.01.16
신동아 2005.08.01 통권 551호 p524 ~ 534
연합뉴스 2006.07.04

사이트
http://blog.daum.net/sharonk
http://www.kyunggi5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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